[송석주의 컷] 비극의 순간에 위로와 연대의 불씨를 피우는 영화

"그 장면 어땠어?" 영화관을 나오면서 가장 많이 하는 말 중 하나다. 전반적으로 괜찮은데 특별히 할 말이 없는 영화가 있고, 흠이 있지만 특정한 장면이 뇌리에 남는 영화가 있다. 전자가 평범한 영화라면, 후자는 매력적인 영화일 것이다. 결국 좋은 영화란 장면이 기억에 남는 영화다. 한 편의 영화를 하나의 장면을 통해 알아보자.

▲TJ(왼쪽)와 야라(오른쪽)의 모습. (영화사 진진)

2016년 영국 북동부의 어느 폐광촌. 마을을 지탱하던 탄광 산업이 몰락하자 주민들은 걱정이 가득하다. 집값이 폭락하면서 마을은 투기꾼들의 먹잇감으로 전락했다. ‘부자 나라’이지만, 이 마을엔 여전히 판잣집에 사는 사람도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에 시리아 난민들을 태운 버스 한 대가 도착한다. 가뜩이나 사는 게 팍팍했던 주민들은 난민들을 환멸의 눈으로 바라본다. 켄 로치의 영화 ‘나의 올드 오크’의 초반 줄거리다.

켄 로치의 말처럼 이 영화는 주민(住民)과 난민(難民), 두 공동체에 관한 이야기다. 주목할 것은 그들 모두 사회적 약자라는 점이다. “이 동네에만 몰아넣고 런던의 부촌엔 안 둬”, “자기들은 옆에 살기 싫으니까. 버스에 실어서 우리한테 던지는 거야”, “우리더러 어쩌라고. 우리도 살기 힘들어” 등의 대사를 내뱉는 주민들이 ‘약자’라는 데에 이 영화의 비극성이 있다. 켄 로치는 이 비극성을 통해 희망이란 무엇이고, 어디에 있는지 묻는다.

영화는 주민으로 대표되는 TJ(데이브 터너)와 난민으로 대표되는 야라(에블라 마리)의 시점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TJ는 야라를 도우면서 주민들과 난민들이 화합할 수 있도록 노력한다. TJ는 그들이 주기적으로 함께 식사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데, 그곳이 바로 자신이 운영하는 동네의 오래된 술집 ‘올드 오크’다. 하지만 TJ의 친구이자 올드 오크의 단골인 찰리는 그런 TJ가 불만이다. 찰리는 일부러 식당 배관을 고장 내면서까지 올드 오크를 훼손한다.

▲올드 오크에서 맥주 잔을 들고 있는 찰리의 모습. (영화사 진진)

찰리에게도 사정이 있다. 장애인 아내, 딸과 힘겹게 살며 집값 폭락에 눈물까지 보이던 찰리. 난민들로 인해 집값은 더 내려갈 수도 있다. 찰리는 TJ에게 올드 오크에서 난민 규탄을 위한 공청회를 열자고 제안한다. TJ가 이를 거부하자 찰리는 서운함을 느낀다. 이후 TJ가 올드 오크에서 난민들을 위한 식사 자리를 주기적으로 열자 서운함은 모욕감으로 커진다. 사실 올드 오크는 찰리가 자신의 약혼식을 올린, 그에게도 소중한 공간이었다.

TJ는 올드 오크를 훼손한 찰리를 찾아가 “난민들이 오기 한참 전부터 마을은 이미 망가지고 있었다”라며 “너 멍청한 놈 아니잖아. 근데 어쩌다 이렇게 됐냐”고 말한다. 이어 “삶이 힘들 때 우리는 희생양을 찾는다. 절대 위는 안 보고 아래만 보면서 우리보다 약자를 비난한다. 언제나 그들을 탓한다. 약자들의 얼굴에 낙인을 찍는 게 더 쉬우니까”라고 일갈한다. 찰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황망한 표정을 짓는다.

영화의 마지막, 야라의 아버지가 시리아에서 죽었다는 비보가 전해지자 마을 사람들이 조문을 온다. 그 순간 화면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찰리 가족이 포착된다. 아내의 휠체어를 밀고 딸과 함께 등장하는 찰리의 모습을 카메라는 멀리서(long shot) 바라본다. 그러니까 화면 안에 있는 찰리는 화면 바깥에 있는 관객들과 가장 먼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딸에게 조화를 건넨 찰리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조문 행렬과 거리를 유지한다.

영화에는 TJ와 야라가 찰리의 방문을 알아채는 장면이 등장하지 않는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켄 로치는 난민을 강력하게 규탄했던 찰리를 그 자리에 소환함으로써 위로와 연대의 불씨를 피운다. 조문 행렬 속 찰리의 존재감처럼, 멀리 있고 잘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있는 것. 희망도 그런 종류일 것이다. 희망이 허황된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것을 버리면 자신의 심장이 멈출 거라던 야라. 아마 야라는 찰리의 방문을 가장 고마워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