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전쟁’ vs ‘서울의 봄’…정치가 영화를 이용하는 법 [이슈크래커]

입력 2024-02-14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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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다큐스토리, 명필름·시네마6411)
▲(사진제공=다큐스토리, 명필름·시네마6411)
최근 정치권에서 영화가 자주 언급되고 있습니다. 여야 인사들이 전직 대통령 등 각 진영의 주요 인사를 소재로 한 영화를 공개 관람하거나 후기를 남기고 있는 건데요. 이는 4·10 총선을 2개월가량 앞두고 유권자들의 표심을 공략하기 위한 행동으로 풀이됩니다.

정치권에 따르면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책위원장은 설 연휴 마지막 날인 12일 서울 여의도의 한 영화관에서 당직자들과 함께 영화 ‘건국전쟁’을 관람했습니다.

‘건국전쟁’은 이승만 전 대통령의 업적을 부각한 다큐멘터리 영화인데요. 한 위원장뿐만 아니라 다수의 여당 인사들이 영화를 관람하고 각자의 SNS에 후기를 올리면서 관람을 독려해왔습니다.

영화를 통해 유권자들과의 거리를 좁히려 드는 게 여당만의 일은 아닙니다. 앞서 야당은 누적 관객 수 1300만 명을 기록한 ‘서울의 봄’을 적극적으로 언급하면서 정부여당 심판론을 강조했습니다. 영화가 하나의 공세 무기가 된 겁니다.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한 영화가 정치권에서 언급되는 게 표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진영을 결집할 카드로 작용한다는 주장과 오히려 중도층을 이탈하게 만든다는 주장이 대립하죠.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12일 오후 서울 여의도 한 영화관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의 생애와 정치를 조명한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 관람을 마친 뒤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12일 오후 서울 여의도 한 영화관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의 생애와 정치를 조명한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 관람을 마친 뒤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與, ‘건국전쟁’ 관람 인증 릴레이…‘운동권 청산’ 연장선?

국민의힘 지도부를 비롯한 여권 주류가 ‘건국전쟁’ 관람 인증 릴레이를 펼치면서, 예비 후보들도 앞다퉈 영화 관람 후기를 전하고 나섰습니다. 설 연휴 동안 정진석, 안철수, 박수영, 김미애 의원 등 현역 의원과 나경원 전 의원, 박민식 전 국가보훈부 장관 등 총선 출마자들이 앞다퉈 SNS에 관람 인증 글을 게재했죠.

한동훈 위원장은 영화 관람 후 기자들과 만나 이 전 대통령에 대해 “대한민국이 여기까지 오게 된 결정적인 중요한 결정을 적시에 제대로 하신 분”이라며 “한미상호방위조약 맺으신 것, 그리고 제가 굉장히 감명 깊게 생각하는 농지개혁 해낸 것. 이 두 가지가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지금과 많이 달랐을 것”이라고 말했는데요.

이어 “그분(이 전 대통령)의 모든 것이 미화돼야 생각하는 것은 전혀 아니지만, 굉장히 중요한 시대적 결단이 있었고 그 결단에 대해 충분히 곱씹어 봐야 한다”며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우리나라가 지금 이렇게 안전한 것이고, 농지개혁으로 만석꾼의 나라에서 기업가의 나라로 바뀐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앞서 한 위원장은 법무부 장관 시절인 지난해 7월 대한상공회의소 제주 포럼 연설에서도 이 전 대통령의 농지개혁을 언급한 바 있습니다. 당시 한 위원장은 이 전 대통령의 농지개혁이 공산주의와 체제 경쟁에서 민주주의를 지킬 토대가 되고 기업의 활동 무대를 여는 등 현대사의 결정적 장면 중 하나라고 평가했죠.

한 장관의 이런 발언은 보수 진영의 ‘이승만 재평가’움직임과 관련이 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식에서부터 자유주의를 강조하며 “이 전 대통령의 업적이 저평가됐다”고 밝혀왔습니다. 이승만 기념관 건립에 개인 명의로 500만 원을 기부하기도 했죠. ‘건국전쟁’에 대해서도 설 연휴에 대통령실 참모들에게 “역사를 올바르게 알 수 있는 기회”라는 취지로 말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이 같은 흐름은 총선을 앞두고 더욱 노골적으로 바뀌었는데요. 영화를 통해 지지층 결집을 시도하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나경원 전 의원은 “문재인 정부 시절 이 전 대통령을 비롯한 건국 세대의 정통성은 부정됐다”며 “이 영화를 통해 대한민국 영웅들에 대한 평가가 바로 서길 기대한다”고 말하기도 했죠.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해 12월 18일 오후 서울 여의도 용산구 CGV용산아이파크몰에서 열린 ‘길위에 김대중’ VIP시사회에서 참석자들과 영화 관람을 기다리고 있다. 왼쪽부터 김부겸 전 국무총리, 권노갑 김대중재단 이사장, 이 대표, 김홍업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 (뉴시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해 12월 18일 오후 서울 여의도 용산구 CGV용산아이파크몰에서 열린 ‘길위에 김대중’ VIP시사회에서 참석자들과 영화 관람을 기다리고 있다. 왼쪽부터 김부겸 전 국무총리, 권노갑 김대중재단 이사장, 이 대표, 김홍업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 (뉴시스)
野, ‘길 위에 김대중’ 이어 ‘서울의 봄’으로 공세…‘정부 심판론’ 강화

정치권에서 영화를 활용해 지지 세력을 결집하려는 시도는 꾸준히 이어져왔습니다. 여당이 ‘건국전쟁’을 띄웠다면, 앞서 야권은 ‘길 위에 김대중’을 통해 지지층 결집을 도모했죠.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지난해 12월 서울 용산의 한 영화관에서 김부겸 전 국무총리 등과 함께 김대중 전 대통령 탄생 100주년 다큐멘터리 영화 ‘길 위에 김대중’ 시사회에 참석했습니다. 이 영화는 문재인 전 대통령도 경남 양산 지역 예비후보들과 함께 관람한 것으로 알려졌죠. 이 대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열어젖힌 민주주의의 길을 잘 지켜나가도록 노력하겠다”며 영화 관람 소감을 밝혔습니다.

‘서울의 봄’을 통해선 날을 세웠습니다. ‘서울의 봄은’ 12.12 군사 쿠데타를 다루며 극장가를 휩쓴 작품인데요. 정청래 최고위원은 지난해 11월 민주당 최고위원회의에서 “나라를 지키는 군대가 어떻게 국가를 향해 총을 쏘고 나라를 유린했는지 생생하게 봤다. 군복 대신 검사의 옷을 입고, 총칼 대신 합법의 탈을 쓰고 휘두르는 검사의 칼춤을 본다”며 현 정권을 이 영화 내용에 빗대는 발언을 했죠.

김동연 경기지사는 SNS에 “영화를 보는 내내 불편하고 화까지 났다”며 “세상은 어지럽고 경제는 어렵다. 우리 사회에 시들지 않는 소나무와 잣나무가 많아져야 한다.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있어야 우리나라가 제대로 나아갈까”라고 적었고, 서용주 상근부대변인은 라디오 ‘박영환의 시사1번지’에서 “10월에 있었던 강서구 보궐선거를 다시 돌아본다. 국민들이 윤석열 정부에 대한 검찰 독재와 오만에 대해서 심판한 것”이라며 “그런 심정들이 ‘서울의 봄’에 투영이 됐다”고 주장하는 등 전두환 정권의 군부독재와 윤석열 정부의 이른바 검찰 독재를 연관 지었죠.

이에 여권의 이번 ‘건국전쟁’ 띄우기가 민주당의 ‘정부 심판론’에 맞선 맞불 성격이라는 분석도 나옵니다. 민주당 등 야권이 주도하던 역사를 통한 프레임 형성에 대항해 역결집을 시도한다는 건데요. 민주당이 ‘서울의 봄’을 통해 정부여당을 비판하자, 국민의힘은 “12·12를 일으킨 하나회를 척결한 것도 우리 당 뿌리인 문민정부”라고 맞받기도 했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 대통령이 8일(현지시간) 플로리다주 팜비치의 마러라고 별장에서 연설하고 있다. (AP/뉴시스)
▲도널드 트럼프 전 미 대통령이 8일(현지시간) 플로리다주 팜비치의 마러라고 별장에서 연설하고 있다. (AP/뉴시스)
미국에서는 선거용 영화도 제작…표심에 어떤 영향 줄까

미국에서는 노골적인 정치용 영화가 제작되기도 합니다. ‘더 퍼지’ 시리즈는 보수 정치인들이 1년 중 하루, 12시간 동안 살인 등 모든 범죄를 허용해주는 ‘퍼지 정책’을 내놓는다는 설정을 담고 있습니다. 부유층은 안전시설 등 대비책을 마련해놔 별다른 문제가 없지만, 빈곤층은 서로 약탈하고 살해하며 죽어나가며, 정부가 이렇게 빈곤층에 대한 복지비용을 줄인다는 황당한 이야기입니다.

세 번째 시리즈 ‘더 퍼지 : 심판의’ 날은 2016년 미국 대선을 앞두고 공개됐는데요. 퍼지 정책에 진보 정치인들이 반기를 들고 나서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립니다. 영화 포스터에는 당시 공화당 대선 후보였던 도널드 트럼프의 선거 캐치프레이즈,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Let’s Make America Great Again)가 대놓고 적혀 있었죠. 즉, 트럼프와 공화당을 영화 속에서 빈곤층을 학살하는 ‘괴물’에 노골적으로 빗댄 겁니다.

그러나 막상 이 같은 영화가 선거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합니다. ‘더 퍼지: 심판의 날’은 황당한 서사에도 흥행엔 성공했는데요. 북미에서만 8000만 달러가량을 벌어들였습니다. 그러나 그해 대선에서는 트럼프가 승리를 거머쥐었죠.

한국도 마찬가집니다. 2007년 17대 대선을 앞두고 개봉한 영화 ‘화려한 휴가’는 5·18 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하는데요. 개봉 당시 73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해 흥행에도 성공했습니다. 당시 한나라당에선 불안감이, 열린우리당에서는 기대가 나왔죠. 영화 흥행에 힘입어 열린우리당에 투표하는 이들이 늘어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왔던 겁니다. 그러나 대선은 이명박 당시 한나라당 후보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습니다.

‘광해, 왕이 된 남자’(2012)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연상케 한다는 해석이 나온 바 있는데요. 영화를 본 문재인 당시 민주통합당 후보가 눈물을 흘리며 한동안 자리를 떠나지 못해 화제를 빚기도 했죠. 영화는 천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했지만, 대선은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후보의 승리로 마무리됐습니다.

잘 알려진 ‘3S 정책’(스크린, 섹스, 스포츠)에서 거론될 정도로 영화는 정치적 수단으로 곧잘 활용됩니다. 긴밀한 거리에서 대중을 선동하고 특정 이념을 선전할 수 있기 때문인데요. 막상 표심에는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걸 위 사례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죠. 오히려 정치 양극화를 부르면서 중도층의 반감을 자아내는 등 부작용이 따를 수도 있습니다. 정치권에서 바라봐야 하는 건 영화가 아니라 결국 국민, 민심이라는 사실이 다시 한번 강조된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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