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창] 아흔여섯 살 되신 어머니의 어린 시절

입력 2024-02-23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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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나의 어머니는 우리가 세는 나이로 아흔여섯이다. 몸은 많이 야위고, 거동도 많이 불편하시다. 아직 총기 있게 말씀하실 때도 있지만, 찾아간 아들이 누구인지 모를 때도 있다. 이러면 찾아간 자식들도 그게 안타까워 이내 한 번 더 찾아뵙게 된다. 좀 더 활기차고 총기 있게 말씀하시는 모습을 보면 한동안 안심스러운 마음이 된다.

어머니는 1929년에 태어나서 1937년에 강릉에 있는 보통학교에 입학했다. 6년 초등교육을 받는 동안 학교는 보통학교에서 심상소학교로, 다시 국민학교로 세 번 이름을 바꾸었다. 일제강점기의 말기였고, 일본이 이차대전에 참전하고 패배하던 시기였다.

그런 어머니가 추억처럼 떠올리는 세 가지 물건이 있다. 가끔 겉옷 위에 걸치는 망토 이야기를 하신다.

서울 작은집에 다녀오신 할아버지가 학교 다니며 추울 때 저고리 위에 덮개처럼 걸치고 다니라고 망토를 사 오셨는데 한두 번 입어보고는 학굣길에 사람들이 다 자신만 쳐다보는 것 같아서 추워도 입고 다니지 못했다는 것이다. 열 살쯤 된 소녀의 마음으로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다음 떠올리는 물건이 세라복이었다. 자료를 찾아보니 일본과 우리나라 여학교 교복의 원조가 되는 세일러복은 원래 세계 여러 국가의 해군이 함정 갑판에서 착용하던 제복이었다.

세일러복의 가장 큰 특징은 양쪽 어깨를 덮을 만큼 큰 옷깃이다. 함정 갑판에서 바닷바람 때문에 대화하기 힘들 때 이 옷깃을 귀 가까이 세우고 말을 나눴다고 한다. 또 세일러복 앞쪽 모습이 가슴 쪽으로 크게 벌어지는 역삼각형 형태를 띠고 있는 것도 바다에 떨어졌을 때 헤엄치기 쉽도록 옷을 쉽게 찢을 수 있게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세일러복이 세라복이라는 이름으로 일본 여학교의 교복이 되고 또 해방 후 우리나라 여학교의 가장 흔한 모습의 교복이 되었다.

어머니가 세라복을 입었던 것은 조선총독부가 전국 관공서 근무자와 학교 교원들에게 제복을 입게 하고 중등학교 이상 학생들에게 교복을 입게 할 때 국민학생은 굳이 교복을 안 입어도 되지만 어머니의 이모님이 조카에게 세라복을 직접 지어 선물했다고 한다. 국민학생이 그렇게 입고 나서자 다들 키가 작은 고등여학교 학생으로 여겨 그것이 부끄러워 몇 번 입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고무신은 일제가 대동아공영권을 앞세워 동남아를 침략하여 싱가포르를 함락한 다음 그것을 기념하여 각 학급마다 고무신 두 켤레씩 ‘덴노헤이카 하사품’이란 이름으로 나왔을 때 받았다고 했다. ‘경성고무공장’이나 ‘대륙고무공장’에서 나온 조선 고무신은 고무로만 만들었고, 어머니가 받았던 것은 고무와 말가죽 가루를 섞어 만든 일본식 고무신이었다고 했다.

그런 어린 소녀 시절 ‘국어(일본어) 상용’ 딱지를 나눠주고 친구가 조선말을 할 때 그걸 한 장씩 서로 빼앗고 빼앗기던 슬픈 추억도 이야기했다. 어머니가 옛 시절을 추억하며 지금도 세상 먼저 떠난 친구들에게 가장 미안하고 안타깝게 여기는 부분이다.

그런 중에도 옛날얘기만은 ‘무카시 무카시’ 하는 일본말이 아니라 ‘옛날에 옛날에’ 하는 우리말로 들어야만 제대로 재미를 느낄 수 있어 방과 후 집으로 오던 길에 대여섯 명의 소녀가 아무도 몰래 남의 집 짚가리에 들어가 옛날얘기를 나누던 얘기도 했다.

그러면서 글을 쓰는 아들에게 말씀하신다. 말이란 바로 그런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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