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 뇌신경질환 중 유독 ‘이 병’만 지원법이 없습니다.”
국내 뇌전증 환자들이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있다는 우려가 크다. 뇌전증은 치매, 뇌졸중과 함께 3대 뇌신경질환으로 꼽힌다. 치매는 ‘치매관리법’, 뇌졸중은 ‘심뇌혈관질환의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에 근거해 환자들을 보호·지원하고 있다. 하지만 뇌전증 환자를 위한 정부의 지원 제도는 미비한 실정이다.
김흥동 한국뇌전증협회장(강북삼성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은 뇌전증 질환 관리에 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본지는 최근 김 교수를 만나 국내 뇌전증 환자들의 고충과 치료 환경 개선 방안을 들었다.
대한뇌전증학회에 따르면 국내 뇌전증 환자는 약 37만 명으로 파악된다. 이는 뇌전증 진단을 받은 환자외에도 드러나지 않은, 일명 숨은 환자까지 포함한 수치다. 치매 환자는 약 70만 명, 뇌졸중 환자는 약 63만 명인 것과 비교하면 적은 수가 아니다. 특히 소아 100명 중 약 3명은 뇌전증을 앓는다. 전체 뇌전증 환자 가운데 약으로 조절되지 않아 장애 등급을 부여한 환자도 약 7000명으로 집계된다.
김 교수는 “뇌전증이라는 병명 이전에는 ‘간질’이라고 불렸던 질병으로, 어린아이들에게서 흔히 발생하는 것으로 인식됐지만, 반드시 소아 환자만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환자 수가 적지 않은 만큼, 질병에 대한 체계적인 관리가 절실한 분야”라고 강조했다.
뇌전증은 불치병이 아니다. 환자들은 얼마든지 자아를 실현하고 사회적으로 높은 성취를 할 수 있다. 뇌 일부를 절제하는 수술적 치료가 도입됐으며, 다양한 항경련제와 발작을 획기적으로 감소시키는 신약도 지속해서 개발되고 있다. 문제는 부족한 인식 수준이다. 뇌전증은 완치 불가하다는 오해가 확산해 있으며, 이는 환자들의 사회 활동에 걸림돌이 된다.
김 교수는 “나폴레옹, 고흐, 단테, 도스토옙스키 등 역사적인 인물들도 뇌전증을 앓았지만, 큰 업적을 남겼다”라며 “현대 의학 수준으로는 환자들이 약으로 증상을 조절하면 일상에 아무런 지장 없이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이어 “뇌전증은 고칠 수 없고, 평생 조심스럽게 숨어 살아야 한다는 편견은 사라져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질환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부족하다 보니, 환자들이 건강을 위협받는 상황도 빈번하다. 뇌전증 환자를 위한 응급처치 요령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아, 공공장소에서 발작을 일으키는 환자에게 심폐소생술(CPR)을 시도하거나 억지로 약을 먹이는 등 오히려 환자를 해칠 수 있는 위험한 조치가 시도되기 일쑤다.
김 교수는 “환자들이 제대로된 응급처치를 받지 못해 평생가는 뇌손상을 입게 되는 안타까운 사례가 많다”라며 “간단한 교육만 하면 비의료인도 충분히 뇌전증 환자의 발작에 대처할 수 있는데, 현재는 환자들이 경련을 일으키며 쓰러졌을 주변에 올바른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할 것으로 기대하기 어렵다”라고 말했다.
국내 환경이 이렇다 보니 뇌전증 환자들은 질병을 숨기고 대외 활동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게 된다. 학교나 직장 등에서 단체 생활을 하다가도 언제 발작이 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우울증, 공황 등을 겪는다. 조직에서는 질병이 있는 구성원에 부담을 느껴 환자들을 알게 모르게 배척하는 현실이다. 뇌전증지원센터에 따르면 뇌전증 환자의 사망 위험은 일반인보다 약 2.25배 높으며, 환자 3명 중 1명은 우울증이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김 교수는 “뇌전증을 앓는 아이는 어린이집이나 학교에서 입학을 거절당하고, 아이의 부모들은 아이가 상처를 받거나 위험한 상황에 처할까봐 아이를 점점 더 숨기고 보호하게 된다”라며 “환자들을 가정에서 전적으로 혼자 보호해야 하는 부모들은 직업과 사회생활을 포기하기 마련”이라고 말했다. 이어 “환자들은 권리를 침해당해도, 질병을 밝히기 꺼리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거나 정부에 도움을 구하지 않는다”라고 설명했다.
해외의 상황은 국내보다 한참 앞서 있다. 북미와 유럽 지역 선진국 대부분은 뇌전증 환자를 위한 응급조치 방법이 보편적으로 교육되고 있으며, 입학이나 채용 시 환자에게 병력 확인을 요청하는 것을 법률로 금지하고 있다. 특히, 미국의 경우 교사는 무조건 뇌전증 환자의 경련에 대처하는 방법을 교육받아야 한다.
김 교수는 “국내에도 뇌전증 환자들을 위한 지원법을 제정하면, 일정 규모의 기관은 보건관리담당자를 두고 환자를 돕도록 체계적으로 교육할 수 있을 것”이라며 “건강하게 사회생활을 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된다면 환자들의 삶은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편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다만, 아직 국내 뇌전증 질환 관리 정책은 갈 길이 멀다. 현재까지 종교단체와 학회 등 민간 조직의 사회공헌 활동 차원으로 제공하는 지원 이외에는 뇌전증 환자를 위한 복지제도가 없었다. 국회에는 2020년부터 법안이 계류 중이지만, 21대 국회가 종료되기 전까지 약 2개월이 남은 시점에서 해당 법안이 통과될 가능성은 낮은 실정이다.
김 교수는 “법률은 환자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장치”라며 “향후 세부적인 제도가 뒤따라 더는 환자들이 차별과 편견으로 고통받지 않길 바란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