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사법시스템 개선 없이 산업스파이 막을 수 있나

입력 2024-03-08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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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하이닉스가 미국 마이크론으로 이직한 전직 연구원 A 씨를 상대로 낸 전직 금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이 최근 인용했다는 보도가 어제 나왔다. 사법부가 기술 피해를 호소하는 SK하이닉스 손을 들어준 결과다. 재판부는 “경쟁력을 훼손당할 것으로 보이는 점, 원상회복은 사실상 불가능한 점 등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재판부는 위반 1일당 1000만 원의 이행강제금도 명령했다. A 씨가 마이크론에 계속 근무하거나 자문 등을 하면 7월까지 매달 약 3억 원을 배상해야 한다는 의미다. A 씨는 앞서 2022년 7월 퇴직 무렵 2년간 전직을 하지 않겠다는 약정서에 서명했다.

첨단 분야의 전직은 대개 일자리를 옮기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경쟁 판도를 가를 지식과 정보가 함께 넘어가기 일쑤다. ‘인재 영입’은 기술 탈취의 완곡어법일 뿐이다. A 씨 전직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관계자들은 다 알았을 것이다. 피해 회사만 한동안 몰랐을 뿐이다. 기술 강국들이 ‘산업스파이’에 민감한 것은 다 이유가 있다. 예방 법제와 경계 태세가 탄탄해도 100% 막기 어렵고, 피해는 워낙 큰 것이다. 더욱이 우리나라는 법제 등이 허술해 도둑을 불러들이는 부잣집이나 다름없다. 사후에 들통이 나도 피해 복구가 어렵다는 구조적 문제점도 크다.

A 씨는 SK하이닉스에서 D램과 고대역폭메모리(HBM) 설계 관련 업무를 담당했다고 한다. HBM은 D램 여러 개를 수직으로 연결해 데이터 처리 속도를 획기적으로 끌어올린 고성능 메모리다. 인공지능(AI) 반도체의 핵심부품이다. 대만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지난해 세계 HBM 시장 점유율은 SK하이닉스 53%, 삼성전자 38%, 마이크론 9%로 추정된다. 마이크론은 객관적 열세를 딛고 최근 5세대 HBM3E 양산을 시작했다고 깜짝 발표했다. 4세대 기술을 건너뛴 것은 물론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보다 빠르다. A 씨 존재감을 빼놓고는 설명이 안 되는 역전극이다. 재판부는 “채무자가 지득한 정보가 유출될 경우 마이크론은 채권자와 동등한 사업 능력을 갖추는 데 소요되는 시간을 상당 기간 단축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번 선고는 기술사범에 대한 엄단 의지를 담은 만큼 환영할 만하다. 다만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란 한계가 있다. SK하이닉스는 A 씨 전직을 뒤늦게 확인하고 작년 8월 가처분 신청을 했다. 선고는 약 7개월 만에 나왔다. 핵심기술이 넘어가고도 남을 시간이다. ‘한 달 3억 원’ 이행강제금에 마이크론 등이 움츠러들지도 의문이다.

기술 유출 사건에 대한 적절한 대처는 현행 사법시스템으론 꿈도 꿀 수 없다. 일본, 대만처럼 기술유출 사건만 다루는 전문 법원이나 전담 재판부 신설을 검토할 일이다. 양형기준 강화, 간첩죄 적용, 벌금 한도 상향, 몰수·추징 확대 등 처벌 수준도 대폭 강화해야 한다. 국가적 각성도 시급하다. 반도체 1등 기업 보유국인 대한민국은 좋은 먹잇감이다. 국내 기술 유출 피해 규모가 지난해까지 5년간 26조 원에 달한다는 국가정보원 분석도 있다. 첨단 기술을 둘러싼 총성 없는 전쟁을 언제까지 민간 기업에만 떠맡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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