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세상] 영화 ‘듄’이 일깨운 ‘벌레의 가치’

입력 2024-03-26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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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이 허공에서 다리를 휘적거리며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모습을 보면 마치 춤을 추는 것 같고, 혹은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실은 그 어느 쪽도 아니다. 막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어린아이처럼 서툴고 불규칙하게 움직이는 건 ‘샤이 훌루드’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다. 이 생명체는 땅이 일정하게 울리는 순간 지하에서 터져나와 주변의 모든 걸 먹어치운다. 물론 실존하는 벌레 얘기는 아니다. 영화 ‘듄’에서 주인공 못지않은 존재감을 과시하는 초거대 모래 벌레에 대한 설명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생명체에 대한 모든 게 아주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5억년 전 벌레가 해양생태계 뒤흔들어

지난 8일 네이처는 옥스퍼드대학교의 고생물학자 루크 패리(Luke Parry) 교수와의 인터뷰를 실었다. 이에 따르면, 샤이 훌루드와 완벽하게 같은 건 아니지만, 개별적인 특징을 하나씩 지닌 생명체는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도 존재한다고 한다. 다시 말해 영화 속 모래 벌레와 실제로 지구에 사는 벌레 사이에는 몇몇 공통점이 있다는 의미다.

그중 하나가 진동을 통해 다른 생명을 감지하고, 사냥에 나서는 점이다. 영화 속에서 샤이 훌루드의 외관은 지렁이와 유사하다. 몸통 길이가 수백 미터, 두께는 수십 미터에 달하고, 뾰족한 이빨들이 입 안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다는 점에선 지렁이와 차이가 있다. 하지만 진동에 민감한 특성은 실제 지렁이에서 따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지금은 좀 달라졌지만 흙 길이 많던 시절에는 비만 오면 길 여기저기에서 지렁이들이 있었다. 비가 떨어지며 생기는 울림을 포식자의 추격으로 착각해 땅 위로 기어올라왔기 때문이다. ‘지렁이의 부엽토 형성에 관하여’라는 다윈의 저서에도 “땅을 두드리거나 울리게 하면 지렁이는 두더지가 추격해 오는 줄 알고 구멍을 빠져나온다고 한다”는 내용이 있다.

샤이 훌루드가 몸통만큼이나 거대한 입을 벌려 주변의 모든 걸 빨아들이는 걸 보면, 이 생명체는 공포와 재앙 그 자체구나 싶지만, 영화에선 영적인 존재로 추앙받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 모래 벌레가 우주에서 가장 귀중한 물질인 스파이스(spice)를 만들어 내고, 생명수라 불리는 파란색 액체를 분비해 듄, 즉 행성 아라키스를 완전히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구상의 벌레들도 서식지를 바꿨을까? 패리 박사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그의 의견에 따르면 5억여 년 전 벌레가 한꺼번에 해저에 파고들기 시작해서 해양 생태계가 영원히 변화하게 됐다. 벌레가 출현하기 전 해저에는 미생물 매트가 깔려 있고, 아래 퇴적물에는 산소가 거의 침투하지 않았다. 그러다 짧은 기간에 모든 현대 동물문의 대표자들이 거의 동시에 나타나는 캄브리아기 생물 대폭발(cambrian explosion)이 일어나면서 해양 생태계의 변화가 시작됐다. 벌레들이 퇴적물 속으로 파고들며 터널을 파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산소가 침투할 수 있게 되어 더 복잡한 생물들이 해저에 살 수 있게 되면서 바다 속 생태계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하게 된다.

지렁이 배설물이 땅을 비옥하게 만들어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이때 해저를 파고들었던 벌레 중에 모래 벌레만큼은 아니지만 제법 날카로운 치아를 가진 애들도 있었다는 거다. 새예동물(Priaps worms)도 그중 하나다. 좀 길고 가는 프랑크 소시지 두 개가 붙어 있는 것 같은 외형인데, 몸통처럼 확장될 수 있는 근육질의 목이 있어 치아가 바깥 쪽에 위치할 수 있다. 그리고 이걸 이용해 동굴 통로를 통과한다. 만일 벌레가 없었다면 해저는 악취가 풍기는 부드러운 진흙 땅과 같은 모습으로 남아 있었을 지도 모른다. 생태계를 뒤집어 놓는 정도는 아니지만 지렁이의 배설물이 땅을 비옥하게 바꿔 놓는 일 역시 유사한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걸 보면 벌레는 제법 괜찮은 생명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동물들이 벌레를 조상으로 두고 있고, 뒷다리가 퇴화하면서 벌레와 같은 모습으로 진화한 뱀처럼 애초에는 벌레가 아니었지만 그런 모습으로 변해가는 동물도 있다. 게다가 벌레는 모든 종류의 서식지를 정복했고, 심지어 심해의 열수 분출구에서도 발견된다.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모래 행성 아라키스에선 마지막 희망이기도 하다. 이제 ‘벌레 같은 삶’의 의미를 새로 정의해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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