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실 풍경] 편지 한 통

입력 2024-04-17 05:00 수정 2024-04-17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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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랍을 정리하다 오래된 편지 몇 장을 발견했다. 알록달록하고 예쁜 종이 위에 적힌 정성이 담긴 아내의 글. 잠깐 정리를 멈추고 편지를 읽는 내내 풋풋한 연애 시절이 떠오르며 당시의 설레던 마음이 다시 느껴졌다.

요즘엔 우리 주변에서 손편지를 구경하기 쉽지 않다. 며칠 동안 답장을 기다려야 하는 편지 대신 초고속으로 결론을 얻을 수 있는 카톡이나 이메일이 그 자리를 대치했다. 급변하는 시대, 남보다 한발 빨라야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기에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때론 여유와 낭만이 사라진 차가운 세상에 편지가 부활한다면 조금은 따스해지지 않을까란 생각을 해보게 된다.

편지는 느린 단점을 상쇄시킬 만한 장점도 있다. 편지를 쓰는 긴 시간 동안 타인의 입장이 되어보기도, 또 한 문장 한 문장 엮어가며 차분히 생각을 정리하게도 된다. 실수가 적어지고 배려가 더 녹아날 수 있다. 게다가 시도 때도 없이 울리거나 모르는 사람에게서 오는 카톡이나 문자의 악(惡)기능조차 편지에는 없다. 하지만 이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급변하는 세상에 빠르게 적응해야 하는 우린 어쩔 수 없이 다른 전달 수단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편지가 사라져 버린 요즘이지만 병원에선 비슷한 기능을 하는 것이 남아있다. 진료의뢰서가 그것이다. 병명과 진료 과정이 담긴 딱딱한 내용이지만 그곳엔 예전 편지에 녹아있던 그 마음이 담긴다. 오랫동안 진찰했던 환자의 얼굴이 떠오르며 의뢰서에 그분들과 공유했던 기쁨, 슬픔, 아쉬움과 애처로움 등을 담고 마지막엔 꼭 회복되길 바라는 소망이란 끈끈한 풀로 봉투를 봉인한다. 답장이 올 때까지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며칠의 시간, 때론 좋지 않은 결과에 눈물짓게도, 또 회복되고 완치된 결과에 기쁨을 얻게도 되는 그 하나하나의 편지들.

오늘도 진료실 책상 위에 편지 한 통이 놓여있다. 진행된 암 때문에 몇 주 전 고민과 걱정을 한가득 담아 보낸 편지에 대한 답장이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개봉한 봉투 안에는 다행히 수술을 잘 마치고 항암치료를 받으며 좋아진 환자의 경과가 기록되어 있었다. 케모포트 관리를 부탁한다는 추신이 덧붙여져서.

이제 조금은 덜 아프길, 긴 그 길의 끝에 완치의 소식이 전해지길. 소원하는 동안 따스한 햇살 한 줌이 펼쳐진 편지지 위에 스며든다. 어느덧 깊어 가는 봄날, 환한 얼굴로 진료실 문을 열고 나타날 그 환자가 벌써 기다려진다.

박관석 보령신제일병원장·내과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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