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실 풍경] 나도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다

입력 2024-04-24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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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1 년 정도 남았대.” “혹시 오진일 가능성도….” “주여, 매일 쾌유 기도를….”

동문 단톡방이다. 위로, 놀람, 안타까움, 현실 부정,신에 대한 분노, 신에 대한 기도…. 다양한 내용의 단문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산부인과 전문의로 개업해 승승장구하며, 주변의 부러움을 사던 친구. 남자답고 호탕하고 훤칠한 키에 만능 운동선수였던 그. 바쁜 전공의 생활 중에도 내 결혼식에 참석해 주었던 그. 그가 췌장암 판정을 받은 것이다.

주변의 걱정과 달리 그는 여전히 밝고 긍정적이었다. 최신 항암 치료를 받아가며 여전히 병원 경영에 매진했고, 운동도 거르지 않았다. 나를 비롯한 친구들도 그에게 기적이 오기를 바랐던 건지 현실을 부정했던 것인지,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다시 평소처럼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불과 1년도 못 채운 어느날, 우리는 그의 부고를 받게 되었다.

장례식장에서, 아직 병아리 같은 자녀들과, 생활고에 시달려 본 적 없던 해맑고 여린 그의 처를 보자 비로소 그의 부재가 실감이 되었다. 못 먹는 소주를 오랜만에 들이부었다. 조문객들과 그를 추억하다 누군가 한마디했다. “넌 정신과니까 혹시 알지도…, 우리도 시한부 진단을 받는다면 남은 인생을 어떻게 지내는 게 최선일까?” 나는 전혀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단 한마디도. 그 질문은 내 생애에 처음 받아보는 선승의 ‘화두’처럼 내 뇌리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며칠 전, 환자 한 분이 내원하였다.그는 인문학부 교수로 은퇴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요즘 예전에 공부했던 그 수많은 내용들이 머릿속에서 서서히 삭제되고 있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었다.

“내 머릿속에 있는 게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는지 아는가? 이걸 도둑맞는 게 어떤 느낌인지 자넨 아마 모를거야….” 갑자기 깊은 공포감이 내게도 몰려왔다. 나의 가장 소중한 취미 생활은 ‘독서’와 그로 인한 ‘지식 습득의 기쁨’이다. 아마 나도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일이 벌어지겠지….

내 진료실에 꽂혀 있는 손때 묻은 책들을 보았다. 그 책에서 얻은 깨달음과 정보들이 ‘삭제’되는 날이 나도 찾아올 것이다. 그 분은 어느새 울고 계셨다. 나도 같이 울었다.

일요일 저녁, 석촌호수를 뛰던 중이었다. 불현듯, 나이 들면 못 뛰겠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우울에 푹 젖어 뛰던 중, 갑자기 무언가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거야! 지금 이 순간 내 무릎은 안 아프고, 마음껏 뛸 수 있어. 그거면 된 거야.” 나도 시한부 인생이다. 왜 그걸 이제 알았을까.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살아있다는 것이다.

며칠 후, 그 분이 다시 오셨다. “원장님도 뭣 하러 공부해, 나중에 다 까먹을 텐데….” “당연히 까먹겠죠. 그런데, 지금 교수님을 돕기 위해, 최신 지식을 계속 습득하는 것이 전문의의 의무잖아요. ‘바로 여기서’ 써먹기 위해 책을 봐야지요. 내일 잊어버리더라도요.” 그는 어이없다는 건지, 동의인지 분간이 모호한 미소를 지었다. 나도 그에게 환한 미소로 화답하였다.

최영훈 닥터최의연세마음상담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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