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창] 중고시장에 나온 작가 사인북

입력 2024-04-26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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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등학교 시절 취미란에 독서라고 쓰면 독서는 생활이지 취미가 아니라고 면박을 주며 나무라던 선생님이 계셨다. 중학교 때도 그런 선생님이 있었고, 고등학교 때에도 그런 선생님이 있었다. 실제 생각보다 많은 선생님들이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 시절에는 학생들에게 마땅한 취미 활동도 없었다. 방과 후 땀을 뻘뻘 흘리며 공을 차고, 더러 음악을 좋아하는 친구는 몇 개 되지 않은 엘피판으로 같은 노래만 듣고 또 들었다. 수학여행 때도 그 위에 겨우 엘피판 하나 올라가는 크기의 ‘야전’(야외전축)이라고 불리는 작은 전축 하나를 누가 가져오면 여행 중에도 숙소에서도 그것만 틀었다.

전국 중소도시에는 별다른 전시회도 거의 없었다. 영화감상 같은 것도 취미로 삼기 어려웠다. 학생들은 성년 영화를 볼 수 없었고, 청소년이 볼 수 있는 영화도 학교에서 관람 허락이 떨어져야 볼 수 있었다. 또 매주 영화 한 편 보는 것도 큰돈이 들어가는 일이었다.

독서가 그야말로 많은 학생들에게 생활이자 취미였다. 그때라고 입시의 압박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그래도 손에 꼽는 세계 명작은 누구의 추천으로든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와 읽곤 했다. 국내의 유명 장편소설과 단편소설도 많이 챙겨 읽었다. 그 시절 국내 작가들도 대부분 이름 말고 호를 쓰던 때여서 작가의 이름과 호를 맞추는 단답형 퀴즈 놀이도 즐겨했다.

선생님이 권하는 세계 명작 소설이 좀 어려우면 책가방 가득 무협지를 넣어와서 자신도 읽고 주변의 친구들에게 빌려주던 친구도 있었다. 무협지를 워낙 좋아해 무협지 천 권을 읽으면 자신도 무협지를 쓸 실력이 생길 거라고 말하던 친구도 있었다.

돌아보니 그때는 책을 읽는 것 말고는 재미있는 일도 많지 않았고, 또 넘치고 남는 시간에 쉽게 할 수 있는 게 독서밖에는 없던 시절이기도 했다. 어떤 설문조사에 지금은 국민 60%가 아예 독서라는 걸 하지 않는다고 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싶지만, 실제 주변의 친척과 친구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떠올려보면 그 말이 틀린 말도 아닌 것 같다.

책이 유통되는 현실도 그렇다. 얼마 전, 어떤 시인의 절판 시집을 꼭 구해야 할 일이 있었다. 절판 시집이니 중고서적을 통해 구입했는데, 배달되어온 책은 20년쯤 전 그 시인이 첫 시집을 내며 스승 같은 선배 시인에게 감사의 인사를 담아 사인하여 보낸 책이었다. 책을 받은 시인이 사인받은 시집을 중고시장에 내놓은 것이 아니라 그분이 돌아가신 다음 유족들이 그분이 남긴 엄청난 양의 책들을 처리하는 과정에 사인한 지면도 뜯어내지 못하고 그냥 중고시장으로 내보낸 것 같았다.

나 역시 사는 집의 크기는 한정되어 있고, 매년 사거나 받는 책은 늘어나서 틈틈이 서재를 정리한다. 이때 가장 조심스러운 것이 사인받은 책의 정리다. 그 면만 뜯어 따로 보관한다. 그래도 이렇게 누가 누구에게 사인하여 보낸 책이 내 손에 들어왔을 때 그것 역시 귀한 인연으로 진기하게 대하지만, 몇 번 겪고 나니 내 책에 사인하는 일이 조심스러워졌다. 내가 사인하여 보낸 책이 내 손에 들어올 때도 있었다.

예전에는 책 제일 앞표지를 펼쳐 책을 보내드릴 분 이름을 쓰고 그 아래에 그간의 인연에 대한 감사의 말씀과 내 이름을 적어 보냈다. 그런데 지금은 나중에라도 그 책이 또 다른 형태로 판매되거나 돌아다닐 일을 생각해 다른 종이에 사인하여 그걸 속표지에 붙여 보낸다. 그러면 나중에라도 떼어내기 편하고 흔적 지우기가 편할 것이다.

그것이 국민 60%는 아예 독서를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책은 넘쳐나고, 집에 있는 물건 가운데 가장 처치 곤란한 짐이 책이 되어버린 시대에 나온 저자 증정용 사인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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