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던 '구하라법', 숨통 트이나…유류분 제도 47년 만에 일부 '위헌' [이슈크래커]

입력 2024-04-26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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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1월 25일 가수 고 구하라 씨의 일반 빈소가 마련된 서울 강남 성모병원 장례식장에 고인의 영정이 보이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2019년 11월 25일 가수 고 구하라 씨의 일반 빈소가 마련된 서울 강남 성모병원 장례식장에 고인의 영정이 보이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헌법재판소가 '상속'과 관련해 중대한 변화를 가져올 결정을 내렸습니다. 고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가족이라면 유산을 나눠 가질 수 있도록 강제하는 유류분 제도가 '위헌'이라는 판단을 내린 겁니다.

헌재는 25일 민법 1112조 4호에 대해 재판관 전원 일치 의견으로 위헌으로 결정했습니다.

현행 민법은 자녀·배우자·부모·형제자매가 상속받을 수 있는 지분(법정상속분)을 정하고 있는데요. 피상속인이 사망하면서 유언을 남기지 않으면 이에 따라 법정상속분을 배분합니다.

유언이 있더라도 자녀·배우자는 법정상속분의 2분의 1을, 부모와 형제자매는 3분의 1을 보장받습니다. 이를 유류분(遺留分)이라고 하죠.

그러나 헌재는 이날 "피상속인의 형제자매는 상속재산 형성에 대한 기여나 상속재산에 대한 기대 등이 거의 인정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유류분권을 부여하는 것은 그 타당한 이유를 찾기 어렵다"고 밝혔습니다.

사실 헌재는 그간 유류분 제도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린 바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세 번째 심리에서 일부 규정이 헌법에 맞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놓은 겁니다.

▲2020년 08월 11일 서영교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이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구하라법'의 통과를 촉구하고 있다. 서 의원의 왼쪽은 고 구하라 씨의 친오빠 구호인 씨, 오른쪽은 순직한 전북 소방관 고 강한얼 씨의 친언니 강화현 씨. (뉴시스)
▲2020년 08월 11일 서영교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이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구하라법'의 통과를 촉구하고 있다. 서 의원의 왼쪽은 고 구하라 씨의 친오빠 구호인 씨, 오른쪽은 순직한 전북 소방관 고 강한얼 씨의 친언니 강화현 씨. (뉴시스)

학대해도, 자식 버려도 상속받았다…사회적 공분 ↑

이번 헌재 판단으로 주목받는 사건도 있습니다. 가수 고(故) 구하라 씨가 2019년 사망하자, 20년 넘게 연락을 끊었던 친모가 상속권을 주장하고 유산을 받아갔던 일입니다.

구 씨 친오빠에 따르면, 구 씨가 9살일 때 친모는 남매를 두고 집을 나갔습니다. 이후 20년간 연락을 두절하고 살다가 구 씨가 사망한 사실을 알고 재산을 달라고 요구한 겁니다.

현행법에 따르면 딸을 20년간 돌보지 않았어도 친모는 구 씨 재산의 절반을 가져갈 수 있습니다. 자식과 배우자 없이 사망한 자녀의 경우 친부모가 유일한 상속권자입니다. 민법 1000조는 사람이 사망한 경우 그 재산을 상속받을 자, 즉 상속권자가 되는 사람들의 순위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1순위는 사망한 사람의 자식인데요. 자식이 없는 경우에는 사망한 사람의 부모가 2순위 상속권자가 되고, 부모도 없는 경우에는 형제자매가 3순위로 상속을 받습니다.

결국, 구 씨가 자식과 배우자 없이 사망했기 때문에 친부모만 상속권자가 됐고, 구 씨의 재산을 친부와 친모가 각각 절반씩 상속받게 된 겁니다.

돌연 나타난 친모가 사망한 딸이 남긴 재산에 상속권을 주장하자, '상속받을 자격이 없다'는 비난이 쏟아졌는데요. 특히 구 씨 친부는 ‘양육 방기’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신이 받은 상속재산을 구 씨의 친오빠에게 전부 양도한 것과 비견되면서 친모에 대한 비판이 거셌습니다. 그러나 구 씨 친모는 소송에서 승소, 결국 유산의 40%를 받아갔죠. 이 사건은 사회에 큰 화두를 던졌습니다.

이외에도 천안함 피격 사건으로 순직한 장병의 친부는 자식과 20년 넘게 연락 없이 살았지만, 보상금으로 1억 원을 받아갔습니다. 아들이 숨지자 54년 만에 나타난 친모도 사망보험금 중 3억 원을 받아갔죠. 이들이 본인 몫의 상속권을 요구한 법적 근거는 모두 유류분 제도였습니다.

사회적 공분이 커지자, 국회는 2021년 부양 의무를 게을리한 부모를 상속 결격자로 정하는 일명 '구하라법'을 상정했습니다. 법무부도 2021년 6월 비슷한 내용의 상속권 상실제도를 신설하는 민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죠. 가족이라도 중대한 부양 의무를 위반하거나 중대한 범죄 행위는 물론, 학대나 그 밖에 부당한 대우를 했을 때 상속권을 잃을 수 있도록 하는 법안입니다.

그러나 구하라법은 제20대 국회에선 회기가 만료돼 폐기됐고, 제21대 국회에선 계류 중입니다. 법무부 상속권 상실 제도도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죠.

▲지난해 3월 23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깃발이 휘날리고 있다. (뉴시스)
▲지난해 3월 23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깃발이 휘날리고 있다. (뉴시스)

판사 직권으로 위헌법률심판 제청도…고인 형제·자매, 유류분 주장 못 한다

해당 제도에 대해선 개인의 재산권을 침해한다는 지적도 꾸준히 제기됐습니다. 특히 '생존권'을 취지로 강제로 상속분을 부여하는 이 제도가 변화한 현대 사회를 반영하지 못한다는 목소리가 컸죠.

2020년에는 판사가 직권으로 헌재에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하기도 했습니다. 그해 1월 이민을 가 외국에 사는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상대로 낸 유류분 반환청구 소송을 맡게 된 서울중앙지법 권순호 부장판사(현 부산회생법원장)가 심리를 중단하고 헌재를 찾은 건데요. 그간 유류분 제도와 관련해 일반 시민이 헌법소원을 낸 사례는 많았지만, 판사가 보기에도 문제가 있다며 헌재에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하면서 이목을 끌었죠. 당시 위헌제청 결정문에는 "재산형성 과정에 기여가 없고 불효나 불화 등으로 관계가 악화된 자녀들에게도 재산이 무조건 귀속되도록 강제할 이유가 없다"는 문구가 담겼습니다.

이를 기점으로 유류분 제도의 위헌 논란은 더욱 거세졌습니다. 이후 지금까지 유류분 제도에 대한 위헌제청은 47건이 쌓였는데요. 이 중 14건은 판사들이 낸 건입니다.

달라진 세태와 유류분 제도가 피상속인의 자유를 일부 제한한다는 지적이 잇따르면서, 헌재가 제도 자체에 대해 전면 위헌 결정을 내리진 않더라도 시대 변화를 고려해 일부 조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또는 한정위헌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 바 있습니다.

이날 헌재는 유류분 제도 자체는 여전히 존재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헌재는 “고령화를 넘어 초고령화 사회에 진입한 현실에 비춰 볼 때 피상속인의 배우자나 직계비속도 상속개시 당시 이미 고령이어서 특별한 경제적 부양이 필요한 경우가 더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며 “아직은 모든 세대와 지역에서 남녀평등이 완전히 실현됐다고 보기 어려운 상황에서 유류분 제도가 상속인의 상속 재산에 대한 기대를 일정 부분 보장하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고 했죠.

다만 유류분을 규정한 몇 가지 민법 조항은 불합리하다며 위헌, 헌법불합치 결정을 했습니다. 이에 따라 당장 고인의 형제자매는 사전 증여를 약속받지 않는 이상 유류분을 주장할 수 없게 됐죠.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공은 국회로…"제도 모순에 의한 피해 막기 위해 조속한 입법 필요"

헌재가 이날 유류분 상속인에 형제·자매를 포함한 일부 조항에 대해 위헌 및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리면서 국회는 내년 12월 31일까지 법을 개정해야 합니다. 공은 국회로 넘어간 상황이라는 건데요. 제22대 국회는 다음 달 30일부터 임기를 시작합니다.

이번 위헌 결정으로 유류분 제도가 일부 없어지고 기여 정도에 따라 상속이 이뤄진다면, 상속 분쟁은 지금보다 심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옵니다. 개개인의 재산권이 걸린 예민한 사안인 만큼, 신속하면서도 정교한 법 정비가 필요한 시점인데요.

노종언 상속 전문 변호사는 YTN24와의 인터뷰에서 "상속 분쟁이 많이 일어날 우려가 있어서 법 제정을 포기해야 한다는 건 기본적으로 어떤 피해자가 발생했음에도 그들에 대한 피해 구제를 국가 입장에서 포기한다는 의미나 다름없으므로 법 제정은 계속 이뤄져야 할 것"이라며 "법이 제정되지 않는다면 제도의 모순으로 인해서 발생할 수 있는 불행한 피해자들을 양산하게 되기 때문에 국회에서 조속한 입법을 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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