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창] 지폐, 시대의 자화상

입력 2024-05-17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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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택 연필뮤지엄 관장

프랑스대혁명(1789년) 100주년과 파리박람회 개최를 기념하는 에펠탑은 설계자인 구스타프 에펠의 이름을 딴 것이다. 무지막지한 철골 덩어리가 도시미관과 주거환경을 훼손한다는 이유로 건립 당시에는 거센 비난을 받았지만, 지금은 유럽 여행의 필수 코스이자 해마다 수백만 명의 관광객이 방문하는 명소가 되었다.

에펠탑은 철이라는 신소재, 전통 미학과는 어울리지 않는 파격적인 형태, 특별한 기능이 없는 순수한 조형성만으로 과거의 모든 기념비들을 뒤로 한 채 모더니티를 대표하는 아이콘이 되었다. 내용적으로는 왕정 타파와 민주주의, 무한한 진보를 약속하는 과학기술의 상징이다.

건설 기술자 에펠은 지폐의 모델이 되었다. ‘근대’를 일으켰다는 프랑스의 자부심이기도 하다. 지폐에는 생텍쥐페리, 폴 세잔, 퀴리부부(마리 퀴리는 폴란드인)도 등장한다. 문필가, 화가, 과학자들로 이들 역시 각 분야에서 혁신을 일궈낸 인물들이다. 파리가 예술과 문화, 혁신의 도시임을 방증하는 것이다.

EU통합으로 개성 넘치던 프랑스의 지폐는 사라졌다. 새로 등장한 유로화에는 그리스로마·로마네스크·고딕·르네상스·바로크·모던·포스트모던 건축양식의 문과 다리가 등장한다. 이들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유럽의 전통과 미래 가치, 소통과 연결’의 의미를 담은 가상의 이미지를 창출한 것이다.

EU에 가입하지 않는 노르웨이는 자신들만의 지폐를 사용한다. 지폐의 앞면에는 그들의 환경을 반영한 등대·바이킹선·물고기·파도 등이 주요 소재로 채택되었다. 뒷면이 압권이다. 컴퓨터그래픽 작품 같은 픽셀로 채워져 있다. 무엇인지 알기 힘든 이미지로 ‘독창적이고 현대적이면서 주제가 잘 표현된 디자인’이라고 한다. 관계자에 따르면 “지폐를 죽 늘어놓았을 때 서로 연결되는 픽셀을 통해 긴 해안선이 연상된다. 추상적인 형상을 통해 사람들은 저마다의 해석이 가능하다”고 했다. 천변만화로 출렁이는 바다물결이 떠오를 수도 있다. 지폐를 통해 노르웨이는 스스로 규정한 바다라는 정체성을 세상에 알렸고 디자인 강국이라는 이미지도 굳혔다. 프랑스와 EU, 노르웨이의 지폐에는 자신들의 정체성과 시대정신이 반영되어 있다.

돈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사용하는 생활필수품이다. 이 지폐에 세계 모든 나라들은 자신들의 이념과 가치관, 미적 취향, 문화적인 감수성을 담으려 노력한다.

우리나라의 현행 지폐에는 줄줄이 조선시대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모두 수세기 전의 선비들이자 관료들(세종과 사임당도 마찬가지)이다. 현재의 우리가 왕정 체제에 성리학을 국시로 하는 국가인가? 등장인물들의 실체도 불분명하고 초상도 다 상상화일 뿐이다. 그들의 사상 또한 작금의 현실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다. 어떤 이는 “50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나라가 조선의 인물에 한정돼 역사를 일부만 보여 준다”라고 비판하지만, 이 또한 비판하고 싶다. 조선의 인물만이 아니라 수천 년 전의 인물도 같이 등장한다면 괜찮다는 뜻일까?

화폐는 근대 이후 시장경제를 이끌어온 중요한 도구였다. 앞으로도 상당기간 그럴 것이다. 근대국가를 지향하는 대한민국이라면 창의와 혁신의 정신을 키우고 합리와 실질을 숭상해야 마땅하다. 조선인들이 점령한 민주공화국의 지폐, 우리는 여전히 갓 쓰고 도포 입은 전근대 ‘유교권위주의’의 향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세계 일류, 한류열풍에 목청을 높이는 것도 좋지만,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옷으로 갈아입는 것부터가 먼저가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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