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창] 책 인테리어

입력 2024-06-14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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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택 연필뮤지엄 관장

그 땐 여염집에도 ‘가정의학백과사전’이나 ‘세계문학전집’이 있었다. 먹고 살기 팍팍한 시절이었지만, 사람이 밥만 먹고 살 수는 없다. 책이야말로 재미도 있고, 의미도 있고, 교양도 함양할 수 있는 물건 아니던가? 정 무료할 땐 의학백과사전이라도 펼쳐놓고 읽었는데, 응급 상황이 발생할 땐 그런대로 도움이 되었다.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겨우 ‘한국단편문학전집’을 들여놨다. 제대로 읽은 것이라고는 서너 권에 불과한데, 이후 매달 할부금을 내느라 내 알량한 용돈이 거덜 났다. 부잣집 거실에 있는 ‘브리태니커백과사전’급은 아니었지만 우리 집에도 어느 정도의 품격이 들어앉았다.

브리태니커백과사전이 첫 출간된 18세기 후반, 조선의 왕인 정조가 어좌 뒤에 놓여있던 일월오봉도 병풍을 치우고 책가도(冊架圖)를 가져다 놓았다. “어찌 경들은 진짜 책이라고 생각하는가. 책이 아니라 그림이다.” 책을 그림으로 보여주는 것이지만, 독서를 통해 지식을 습득하고 인격을 도야하라는 의도였다. 학덕을 쌓아 큰 뜻을 이루려는 선비라면 모름지기 책을 읽고 글을 써야 했다. 책을 구하기 힘들었던 이들은 책이 그려진 그림이라도 소유하고 싶었다. 거실에 펼쳐놓은 책가도 병풍은 타인에게 자신의 지적 편력과 부를 과시하는 표상이 될 수 있었기에 당대에 널리 유행했다.

장자(莊子)와 두보(杜甫)도 책을 읽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남아수독오거서(男兒須讀五車書 : 남자는 모름지기 다섯 수레의 책을 읽어야 한다). ‘다섯 수레’씩이나? 그 시절엔 남자 노릇하기도 쉽지 않았겠다. 오늘날 관점으로 번안하면 남녀 상관없이 끊임없이 배우고 성장하는 삶의 태도를 견지하라는 것일 게다. 그리하여 너도나도 책을 구하고, 집이나 업무공간에 책이 많은 것을 뿌듯해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책을 읽지는 않더라도 서가는 잘 정돈해 놓은 이들도 있는데 그들의 지식과 교양은 가늠하기 어렵지만 생활양식만큼은 단정해 보인다. 지적인 척하는 과시적인 사물, 책은 예나 지금이나 매력적인 인테리어용품이었음이 틀림없다.

요즘 주변에 책이 쌓여 있는 공간들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북카페는 차를 마시며 독서도 할 수 있는 곳이다. 이러한 개념이 발전되어 차도 마시고 독서도 하며, 필요하면 책을 구입할 수 있는 곳이 국내의 대형서점이나 일본의 쓰타야서점 같은 곳이다. 휴식과 독서, 시장이 결합된 복합문화공간이다.

이러한 추세 때문인지, 어느 지하철역사는 위쪽이 선반형태로 만들어진 기둥에 책이 빼곡히 꽂혀있다. 별마당 도서관은 천장 높이의 책장에 수만 권의 책이 꽂혀있다. 왜 사람 손도 닿지 않는 높은 곳에 책을 꽂아 놓았을까? “만 권의 책을 읽고 만 리 길을 여행하라”는 고사를 오늘에 되살리려 한 것일까? 엄청난 분량의 저 책들은 상당량이 겉표지만 있고 내부는 비어 있다. 겉모양만 책일 뿐, 지면도 글씨도 없다. 플라스틱으로 만든 21세기 책가도!

날마다 책은 쏟아지지만 진득한 독자들은 점점 줄어든다. 핫 플레이스로 자리 잡은 별마당 도서관은 책을 읽는 사람보다 사진 찍는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장중한 책의 무덤일까, 광활한 책의 신대륙일까?

연구한 바에 따르면 읽지 않더라도 집에 책이 많으면, 자녀들이 앞으로 책을 읽을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고 한다. 그런데 무늬만 책인 것들도 그런 효과가 있을까? 이번 주말에 거실의 책 3분의 1 정도를 없애버릴 생각이다. 나의 지적 편력이 빈약해 보일까봐 살짝 염려되기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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