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창] 길을 걸으며 만난 스승들

입력 2024-06-21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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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원 소설가

직업이 글을 쓰는 사람인데, 15년 전 고향 강릉에 가서 그곳에 ‘바우길’이라는 이름으로 걷는 길 탐사를 한 적이 있다. 그건 애초 내 인생에서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25년 전에 초등학교 5학년짜리 아들과 함께 대관령에서부터 산 아래까지 옛길을 굽이굽이 걸어서 ‘아들과 함께 걷는 길’이라는 소설을 쓴 적이 있었다. 그 작품이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교과서에 차례대로 실린 다음 고향에 그런 걷는 길을 개척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의를 받았다. 그때마다 손사래를 치며 피한 일을 끝내 나서게 된 것 역시 우연한 계기 때문이었다.

고향을 무대로 소설을 쓰는 것도 한 작가로서 고향을 사랑하는 일이겠지만, 그렇게 글만 쓰면 일반 사람이 느끼기엔 ‘고향을 팔아먹기만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글로만 고향을 사랑하지 말고 실제 고향에 그대로 남아 있는 옛길을 살려 고향 사람들 모두 좋아하고, 또 외지인들이 찾아와 걸을 수 있는 트레킹 코스를 개발하고 그 길에 이야기를 담아 생명력을 불어넣는 일 역시 작가가 해야 할 일 중의 하나가 아니냐고 했다.

그 말에 고향 옛길 탐사에 착수했다. 옛말에 삼인행이면 필유아사라고 했다. 세 사람이 함께 길을 걸으면 거기엔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는 말이다. 그 당시 내게 걷는 길 탐사는 인생의 또 다른 학교와도 같은 것이었다. 50년을 걸어왔는데도 산길을 걷는 법, 들길을 걷는 법, 오르막길을 걷는 법, 내리막길을 걷는 법을 그야말로 걸음걸이부터 다시 배우며 고향의 둘레길을 탐사했다.

제주 올레길의 성공 때문인지 애초 내가 기획하고 탐사해 나가는 길에 이상한 훼방꾼들이 달려들기도 했다. 그들은 지역에서 무소불위의 힘을 발휘하며 우리가 개척하고 탐사하는 길 중간중간에 엉뚱한 길이름의 간판을 붙여나가기도 했다. 그러자 부모형제들까지 너는 글을 쓰는 사람인데, 왜 지역의 그런 사람들과 다투냐며 모든 것 그만두고 다시 책상 앞으로 돌아가 작가로 글이나 열심히 쓰라고 했다. 팔순이 넘으신 어머니도 매주 주말이면 배낭을 메고 고향집으로 오는 아들을 반가운 얼굴로보다는 불안한 얼굴로 맞이하셨다.

그때에도 길 위의 스승들이 중심을 잡아 주었다. 싸움이 싫어서, 또 얼굴에 흙을 묻히기 싫어 물러서면 내 옷과 얼굴은 깨끗해질지 몰라도 장구한 세월 동안 자연과 함께 해온 저 길들이 공사판이 될지 모른다고 했다. 다소 불편하더라도 자연 그대로 두어야 할 오솔길에 방부목으로 계단을 설치해 오히려 걷기 더 불편하게 만들고, 필요하지도 않은 전망대를 설치하고 아무 곳에나 쉼터를 만드는 게 걷는 사람을 위해서 그러는 게 아니라 그 이면에 길을 만드는 자와 공사를 하는 자들의 또다른 경제성 때문에 그런다는 것이었다. 책상 밖의 세상 이치가 그렇다는 것도 길 위에서 처음 배운 셈이었다.

우리가 길을 걷는 것은 그냥 단순히 걸어서 이동하는 의미만이 아니라, 그래서 건강만 지키는 것이 아니라 걷는 동안 한가지 생각을 골똘히 할 수 있어 사유의 폭을 넓게 하고 또 깊게 한다는 것도 하루 종일 걷는 길 위에서 배웠다. 오래 걷는 것이 건강에만 좋은 것이 아니라 한 가지 생각의 끈을 잡고 그것을 오래 생각하는 사고의 인내력을 기르는 일이기도 하다는 이 멋진 말도 함께 길을 걷는 사람에게서 배웠다.

그런 과정을 거쳐 강릉 바우길은 인간 친화적이고 자연 친화적인 길로 세상에 잘 알려진 길이 되었다. 찾아오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최근 그 길을 여러 곳에서 모인 사람들과 다시 한번 걸었다. 길 위에서 만난 친구들과 스승들이 그리워지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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