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용과 타협 사라진 국회 폭주 판쳐
퇴행적 정치판 국민 부끄럽지 않나
윤석열 대통령이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해 국회로 다시 돌아온 ‘김건희 특검법’ ‘채상병 특검법’ ‘지역화폐법’이 4일 국회 본회의 재의결에서 부결돼 최종 폐기됐다. 지난달 19일 더불어민주당 등 야당은 이들 3법을 국회 본회의에서 국민의힘이 불참한 가운데 일방 처리한 바 있다. 채상병 특검법은 대통령 거부권이 이미 두 차례 행사된 법안이다. 개정안은 대법원장이 특검 후보 4명을 추천하면 야당이 2명으로 추리고, 대통령이 이 중 1명을 임명토록 했으나 대법원장 추천 후보들이 부적절하다고 판단되면 야당이 제한 없이 비토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해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이었다.
‘김건희여사 특검법’의 특검 추천 권한도 여당을 배제하고 민주당 등 야당만 가지도록 해 중립성이 상실되고 있다. 최근 제기되고 있는 김 여사의 공천개입 의혹은 야권 중진들도 근거가 없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데도 그대로 수사 대상에 포함하고 있다. 노골적으로 탄핵 ‘빌드업’을 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는 배경이다. 한 시민단체는 이 사건을 공수처에 고발까지 했다.
지역화폐법은 지방자치단체의 지역사랑상품권 발행에 대한 중앙정부의 재정 지원을 의무화한 법안이다. 전 국민 25만 원 지원을 상설화하겠다는 것으로 13조 원의 재정이 소요되는 현금살포 법이다. 지역경제 활성화보다는 재정부담 가중, 물가상승 부채질 등 문제점들이 제기되었지만 막무가내였다.
한편 지난달 26일 방송4법(방송법·방송문화진흥회법·한국교육방송공사법·방송통신위원회법), 노란봉투법(노동조합법 개정안), 전 국민 25만 원 지원법(민생회복지원금지급 특별조치법) 등 윤 대통령이 거부권 행사한 법안들도 국회에서 재의 끝에 모두 부결 처리되었다. 야권은 일부 보완·수정해 재발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야당은 또 삼권분립 위배 소지가 있는 ‘대통령의 재의요구 권한 행사에 관한 특별법안’과 탄핵소추를 앞두고 자진사퇴를 금지하는 국회법 개정안을 발의 상정하고 운영개선소위에 넘겼다.
민생 협치는 안중에 없이 쟁점법안만 단독 처리하고 있다는 비판을 의식한 듯 지난달 26일에는 딥페이크 성착취물 범죄 처벌, 육아휴직 연장 등 77건의 민생·비쟁점 법안을 처리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야 원내대표가 합의한 국가인권위원회 위원 선출에서 야당 추천 후보만 통과시키고 여당 추천 후보는 부결시키는 이례적 결과를 연출해 국회는 난장판이 되기도 했다. 여당 원내대표는 “국회 교섭단체 간 대화와 협상의 기본이라 할 신뢰마저 헌신짝처럼 내던진” “의회정치 파괴“라고 언성을 높였다.
야당은 이외에도 이번 정기국회에서 ‘채상병 순직 은폐 의혹’ ‘서울·양평 고속도로 특혜 의혹’ ‘방송 장악’ ‘동해 유전개발 의혹’ 등 4개 국정조사를 밀어붙일 방침이다. 이 같은 ‘2특검 4국조’는 이번 정기국회의 주요 뇌관이 될 전망이다.
국회로 넘어온 정부의 연금 개혁안도 여야가 대치하고 있다. 지난달 4일 발표된 정부안을 토대로 국회가 합의안을 도출한 다음 국민연금법 등 관련 법률을 개정하는 과정이 남아 있지만, 여야가 개혁안 주요 내용은 물론이고 논의 주체에서부터 엇갈린 주장을 펼치고 있는 상황이다. 국민의힘은 여·야·정이 모두 참여하는 국회 연금개혁특위를 만들어서 모수개혁 및 구조개혁을 통합 논의하자는 방침이지만, 민주당은 정부가 발의한 법안을 소관 상임위인 보건복지위에서 다루면 된다는 입장으로 맞서고 있다.
‘예산 국회’를 앞두고도 여야의 입장차는 첨예하다. 정부의 내년도 예산안은 24조 원 ‘지출 구조조정’을 통해 올해 본예산보다 3.2%밖에 늘지 않은 총 677조 원 규모다. 국민의힘은 정부의 긴축재정 기조를 지지하고 있지만 민주당은 ‘부자감세’로 세입기반이 훼손된 예산안이라며 ‘칼질’을 벼르고 있다.
이처럼 정기국회에서 전방위로 펼쳐진 대치 전선은 곳곳이 지뢰밭이다. 더불어민주당은 개원 두 달 만에 탄핵안 7건, 특검법 9건을 쏟아냈다. 야당은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을 취임 이틀 만에 탄핵했다. 민주당은 이재명 전 대표 등을 수사한 검사 4명에 대한 탄핵안도 발의했다. 검사 탄핵안이 통과되면 이 전 대표에 대한 수사나 재판에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다.
‘다수의 폭정’ 문제는 고대 그리스 때부터 민주주의의 적으로 경고되어 왔다. ‘상호 관용’과 ‘자제’라는 규범이 지켜지지 않으면 민주주의는 무너진다는 경고가 이어지고 있다. 지금 우리 한국 국회에서는 이런 규범이 실종된 채 폭주만이 판을 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19일 2024년 공공기관 신뢰도 조사에 따르면 한국에서 국회 신뢰도는 조사 대상인 30개국 가운데 28위를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4류정치’가 새로 태어나지 않으면 한국의 미래도 암울해질 수밖에 없다. 정치인들은 국민 보기에 부끄럽지도 않은가. 수오지심을 가지고 대오각성 환골탈태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