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시정연설 포기는 아쉬움 남아
임기 초기의 신선한 결기 보여줘야
위기에 빠진 대통령이라도 국정 직무를 소홀히 할 수 없다. 대통령은 국가 원수, 행정부 수반, 군 통수권자, 최고위 외교관으로서 국가와 국민을 지키고 헌법을 수호할 책무를 진다. 어떤 상황에서도 방기해선 안 될 책무이다. 각종 의혹으로 정치 공세를 받으며 국민 신뢰를 잃고 있는 윤석열 대통령도 상황에 흔들리지 말고 국정 책무를 의연하게 수행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국가 자체가 위태로워지고 국민의 생명, 자유, 복리가 위협받게 된다.
과연 윤 대통령이 그런 의연함을 보이고 있는가. 국정에 걸림돌이 되는 여야 갈등, 여권 내 불협화음, 사회단체들과의 이견, 국민 지지도의 추락 등을 정면으로 돌파하려는 모습이 안 보인다. 영부인을 둘러싼 각종 의혹이 점점 구체적으로 드러나며 대통령 자신을 향하고 있어도, 의료 대란이 극도로 심각해져도, 북한의 준동과 협박이 국민을 불안에 빠뜨려도 대통령은 조용하다. 전면에 나서서 여야 정치인들과 대화하고 국민 지지를 얻어 이 난제들을 해결하려고 동분서주해야 할 대통령은 어디 있는지.
대통령실은 해명하길, 야권의 과도한 비판과 격한 정쟁으로 인해 대통령이 직접 나서기 힘들고 만약 나서면 오히려 역효과가 클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대통령이 이처럼 정치 상황을 고려해 뒤로 물러나 있는다면 의연한 국정 책임자라기보다는 계산적 전술가로 자신을 전락시키는 셈이 된다. 각종 의혹이 불법 사안이 아닌데 비난받아 억울하고 그러니 굳이 국민에게 직접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논리도 대통령을 법 기술자로 전락시킬 뿐이다. 대통령은 법조문의 형식 논리만 따지는 수동적 기술자가 아니다. 국민을 의식하고 국민 뜻을 받들어 국정을 이끌고자 법 정신과 국민 정서를 조화롭게 내세우는 적극적 지도자여야 한다.
이 점에서 윤 대통령이 국회 시정연설의 기회를 스스로 포기한 것은 특히 큰 아쉬움을 남긴다. 11월 4일 국회에서 진행된 예산안 시정연설은 한덕수 국무총리가 대독했다. 2013년 이후 11년 만의 대독이다. 연례 예산안은 정부가 국가와 국민을 위해 어떤 일을 하겠다고 밝히는 국정 청사진이다. 이걸 대통령이 국회에서 국민에게 직접 밝히며 국정 책임자로서의 의연함을 보였어야 한다. 만약 우려대로 야권 의원들이 정쟁 장면을 연출했어도 대통령은 굴하지 않고 자기 책무를 다했어야 하고 그런 뚝심 있고 당당한 모습을 국민에게 보였어야 한다.
임기 반환점(11월 10일)을 맞아 이제라도 윤 대통령은 대통령다운 의연함으로 국정을 이끌어야 한다. 이를 위해 두 가지가 요구된다. 첫째, 국정철학을 명료하게 세워야 한다. 의연함은 원칙에서 나오고, 원칙은 체계적인 생각에서 나온다. 이번 시정연설은 연금·노동·교육·의료 4대 개혁을 비롯해 여러 이슈를 백화점식으로 나열했는데 전체를 묶는 가치관과 비전이 부재한 탓에 산만하다. 물질적 민생 이슈들을 열거하는 데 더해 ‘상식과 공정’의 비물질적 가치를 강조했어야 한다. 이런 가치를 뿌리로 해서 각종 민생 이슈가 가지로 나와야 전체적으로 체계성을 갖춰 국민에게 호소력 있게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런 국정철학이 있어야 설혹 비난과 조롱을 받는다 해도 원칙을 찾을 수 있고 원칙대로 가는 의연함을 보일 수 있다.
둘째, 정식 직위를 가진 공직자들에게만 의존하며 국정을 수행해야 한다. 비공식 비선(非線) 인사들의 조각조각 정보와 의견에 의존하면 그때그때 급변하는 상황에 너무 변덕스럽게 휘둘리며 국정을 원칙대로 수행할 수 없게 된다. 부인, 친지, 정치 브로커 등의 말이 종종 솔깃하게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비공식 인사들의 주변적 말이 국정에 반영된다면 전체적으로 일관된 국정 방향을 원칙대로 잡을 수 없게 된다. 그동안 그런 주변적 말들이 총리, 장관, 의원, 대통령실 공직자 등의 조언보다 우선시된 탓에 국정이 공식성을 잃고 우왕좌왕 혼란에 빠졌음은 주지하는 바이다.
윤 대통령 앞의 위기는 심각하다. 그래도 대통령다움을 견지해야 한다.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의연함과 임기 초 보여줬던 신선한 결기로 국정 책무에 충실하고 적극적이어야 한다. 그런 모습이 본인은 물론 국가와 국민을 위해 바른 답이란 점을 윤 대통령 스스로 모를 리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