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F확대ㆍ스타 마케팅 등 주효
퇴직연금 실물이전제가 시행된 지 한 달이 지났지만, 은행권의 퇴직연금 잔액은 오히려 1조 원 넘게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제도가 시행되면 고객들이 퇴직연금을 증권사로 대거 이전하며 은행권 잔액이 감소할 것이라는 예측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퇴직연금을 옮긴 고객은 적었던 것으로 보인다.
1일 금융권에 따르면 5대 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의 지난달 27일 기준 퇴직연금 잔액은 180조2653억 원으로 집계됐다. 퇴직연금 실물이전제가 시행되기 전인 10월 29일(178조7331억 원)보다 1조5322억 원 늘었다.
특히, 개인형 퇴직연금(IRP)의 잔액이 큰 폭으로 증가했다. 같은 기간 개인 IRP 잔액은 54조715억 원에서 55조1941억 원으로 한 달 만에 1조1226억 원이 몰렸다. 확정급여형(DB)은 74조6104억 원으로 전월(74조2585억 원)보다 3519억 원 늘었다. 확정기여형(DC)은 50조4031억 원에서 576억 원 증가한 50조4607억 원이다.
시장에서는 퇴직연금 실물이전제로 은행, 증권, 보험사 간에 이동이 본격화되면 적립 규모가 가장 큰 은행권의 잔액이 감소할 것이라는 전망이 대체적이었다. 올해 3분기 기준 은행권 적립 규모는 210조2811억 원으로 전체 적립금(400조793억 원)의 52.6%에 해당한다. 실제로 실물이전 제도 시행 일주일 만에 퇴직연금 잔액이 600억 원 가까이 줄었다.
그러나 공격적인 영업으로 '고객 지키기'에 성공한 것으로 해석된다. 은행들은 증권사와의 퇴직연금 상품 경쟁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상장지수펀드(ETF) 등을 대폭 확대했다. 유명 연예인을 동원한 '스타 마케팅'을 벌이거나 기프티콘·상품권 이벤트를 진행하는 등 적극적인 마케팅에 나서기도 했다.
연말정산을 앞두고 세액공제 혜택을 받기 위해 퇴직연금 납입액을 늘리는 고객이 늘어난 것도 잔액이 급증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연간 최대 1800만 원까지 납입 가능한 연금저축과 개인형 IRP는 월 75만 원씩 낼 경우 총 900만 원에 대해 세액공제를 받을 수 있다. 두 상품의 세액공제율은 개인의 소득에 따라 13.2%에서 16.5%까지 적용된다. 연간 최대 118만 8000원에서 148만 5000원의 세액공제를 받을 수 있다.
증권사도 퇴직연금 잔고가 소폭 늘어났다. 퇴직연금 잔액 상위 증권사 3곳의 지난달 27일 기준 퇴직연금 잔액은 39조2364억 원으로 실물이동제 직전(38억7213억 원)과 비교해 1.3%(5151억 원) 증가했다.
증권사 관계자는 "기존에 은행에서 원리금 보장 등 안정적 투자를 원하는 투자자는 굳이 공격적인 투자를 위해 증권사로 갈아탈 유인이 많지 않은 것으로 파악된다"며 "다만 아직 실물이전 서비스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연금은 장기투자인 만큼 꾸준하게 자금 이동이 이뤄질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증권업계는 당장 대규모 이동을 기대하기보다는 고객들이 안정적으로 퇴직연금을 이전할 수 있는 환경 조성에 주력하고 있다. 은행에서 퇴직연금에 가입한 고객 중 증권사로 이동해 더 적극적인 투자 환경에서 자산을 운용하려는 수요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실물이전율을 높이기 위해서는 상품 라인업을 다양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현재는 같은 유형의 상품끼리 실물 이전이 가능하다. 디폴트 옵션 상품의 경우 현금화를 해야만 이동할 수 있다. 금융권 관계자는 "사업자들은 상품 라인업을 검토해 계속 늘리려는 분위기다"면서 "원리금 보장 상품에 대한 페널티를 완화하고, 내가 가진 실물이 얼마만큼 넘어갈 수 여러 회사를 비교해볼 수 있는 툴도 서비스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