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언 및 해제 여파가 연일 이어지고 있습니다.
'6시간 천하'로 막을 내린 계엄이었지만, 상황은 급박했습니다. 한밤중 이뤄진 기습 선언에 국회의원들은 다급하게 국회로 달려왔고, 경찰·군인과의 대치 끝에 담을 넘거나 빈틈을 노려 본청에 진입했죠.
이 과정에서 67세 우원식 국회의장이 경찰의 통제를 피해 1m 높이의 담장을 넘거나 82세 '최고령 국회의원'인 박지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결의안 가결 이후 쓰러지듯 잠든 모습 등 긴박했던 상황을 보여주는 사진들이 공개돼 화제가 됐는데요. 네티즌들은 "박지원 옹 고생하신다", "국회의장이 월담이라니, 어메이징 코리아" 등 반응을 내놨죠.
또 이번 사태로 12·12 군사반란을 다룬 영화 '서울의 봄'이 재조명되기도 했습니다. 네티즌들은 '서울의 봄' 포스터에 윤 대통령의 얼굴을 합성하는 등 다양한 풍자물을 만들어 공유했는데요. 적지 않은 시민들이 분노와 슬픔 등 다양한 감정을 밈(meme)으로 승화하고 있습니다.
사회 각계각층에서도 이 같은 움직임이 이는 중입니다. 탄식, 자조뿐 아니라 신랄한 비판, 황당함을 드러내는 풍자까지, '표현의 자유'가 넘실대고 있죠.
특히 눈길을 끄는 건 연예계의 목소리입니다. 통상 정치 이슈에는 침묵하는 연예계지만, 최근 들어선 솔직한 심경을 드러내는 연예인들이 적지 않습니다.
최근 수많은 유명인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심상치 않은 게시물들이 올라왔습니다. 비상계엄 사태에 대한 심경을 담은 글이었는데요. 계엄령이 늦은 밤 선포돼 많은 이들은 새벽이 되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고, 후폭풍에 불안감도 채 해소되지 않은 상황입니다. 연예인이라고 다를 건 없죠. 이들도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배우 김기천은 3일 밤 비상계엄 선포 직후 X(옛 트위터)에 "역사에 기록된다. 부역질하지 마라"라고 신랄한 일침을 가했습니다. 뉴스 보도 화면도 찍어 올린 그는 "국무위원들이 급하게 어디 멀리 간 건 아닌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고도 분노했죠.
김지우는 "계엄군이 국회를 막아서는 모습을 보다니, 이게 무슨"이라고 탄식했고, 박호산은 "집권자와 대치되면 종북몰이하던 1980년대 상황에 어제 밤잠을 설치면서 타임머신을 타고 있는 것 같았다"며 "해프닝으로 넘기기엔 국가를 국민을 들었다 놨다 한 책임이 클 거라고 본다. 계엄이라니, 포고령이라니… 어제 일찍 잠드신 분들이 위너"라고 자조했습니다.
코미디언 김수용은 작심 풍자 글을 게재했습니다. 인스타그램에 "12월 12일 서울의 겨울. 독방은 추울 텐데…"라며 눈이 내린 풍경 사진을 게재한 겁니다.
소신 발언으로 유명한 박명수도 KBS 쿨FM '박명수의 라디오쇼'에서 "거의 밤을 새웠다. 너무 어이없는 일이 생겼다. 많은 분이 밤을 새웠을 것 같다. 국운이 걸려있는 문제인데 누가 잠을 잘 수 있었겠나"라면서도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잘 정리가 되고 있고 다들 발 빠르게 제자리로 돌려놓기 위해서 노력하고 계시니까 믿고 한번 기다려보자"고 청취자들을 격려했습니다.
가수이자 DJ인 배철수는 라디오 '배철수의 음악캠프'에서 "느닷없이 억지 불면을 겪어야 한 지난밤엔 우리 말에 부사가 많아 다행이다 싶었다"며 "바른 언어 생활에선 부사를 췌사 취급한다. 욕설은 되도록 입에 담지 말라고 권장한다. 하지만 우리는 경험으로 안다. 때로는 그런 것들이 엉뚱생뚱한 현실을 이겨내는 데 도움을 준다는 걸”이라며 청취자들을 위로했죠.
가수 김창열은 "계엄 개엄하네"라고 황당한 심경을 드러냈고, 이승환은 비상계엄 여파로 공연 일정을 취소했다가 이내 재개 소식을 알리면서 "할 말 많은 오늘, 더 깊고 짙은 사연과 노래로 만나뵙겠다"고 전했습니다.
방송인 김나영은 "아이에게 할 말이 없다"며 서울 시내 전경이 담긴 사진을 올렸고요. 작가이자 가수 하상욱은 자신의 단편 시집 '불 안 끄고 침대 누움' 글귀를 게재했습니다. '그냥 알아서 제발 꺼져라'라는 문구가 의미심장했는데요. 이 글엔 가수 지드래곤이 '좋아요'를 누르면서 화제를 빚었죠.
영화 평론가 이동진은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지난 하루 동안 절실히 느꼈다. 한 사람의 지극히 위험하고도 어리석기 그지없는 판단과 행동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고통과 분노를 안길 수 있는지"라고 참담함을 표하면서도 "하지만 참담한 기분 속에서도 우리의 시스템과 정신이 가장 큰 권력이 시도하는 패악에 강력하게 맞설 수 있을 정도로 건강하기도 하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 감동도 있었다"고 밝혔습니다.
래퍼 이센스는 "난 정치고 당이고 좌우고 하나도 모르는 멍청이"라면서도 "갑자기 새벽에 계엄령을 내리고 국민한테 '처단'한다고 하는 사람이 우리나라 대통령을 하면 안 되는 것 아니냐"고 의문을 표했습니다. 그는 "계엄령 무효 안 됐으면 우리 다 검열, 처단당하지 않았겠나. 자고 일어나도 어안이 벙벙하다"고 꼬집었죠.
정치적 이슈를 입에 올린 유명인들이 이번에 처음 나타난 건 아닙니다.
4월 제22대 국회의원 총선거(총선), 지난해 8월 일본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2022년 10월 서울 용산구에서 발생한 이태원 참사, 같은 해 3월 제20대 대통령 선거(대선) 등 정치·사회적 이슈가 불거질 때마다 유명인들의 발언은 언론을 타고 전해졌습니다. 정부를 겨냥한 작심 비판부터 주어 없는 의미심장한 글까지 형식도 다양했죠.
이 같은 움직임이 일반적인 건 아닙니다. 정치색을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는 연예계의 숙명(?) 때문인데요. 연예인이 정치 이슈를 언급하는 건 암묵적 '금기'로 치부되기도 하죠. 대중의 관심을 받는 연예인의 특성상 이들의 소신 발언이 거센 저항을 자아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연예인들이 직접 TV 찬조 연설에 나와 특정 정당 혹은 인사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는 모습은 1990년대쯤을 마지막으로, 이제 보기 어려운 일이 됐죠.
연예인들의 정치적 발언이 정치권 공방까지 초래한 사례도 적지 않습니다.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 지지자라는 꼬리표는 떼기도 쉽지 않은데요. 2008년 SNS를 통해 미국산 소고기 수입을 반대하며 "광우병이 득실거리는 소를 뼈째로 수입하다니… 차라리 청산가리를 입안에 털어 넣는 편이 오히려 낫겠다"고 말한 김규리는 16년이 지난 지금도 정치권에서 회자되곤 합니다.
배우 공유는 이번 비상계엄 사태로 20여 년 전의 인터뷰 내용이 다시 한번 '파묘'됐는데요. 당시 그는 가장 멋진 남자로 '아버지, 마이클 조던, 박정희 전 대통령'을 꼽은 바 있습니다. 그는 5일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트렁크' 공개 기념 인터뷰에서 해당 인터뷰와 관련해 "20대 초중반 시절 연예계라는 곳이 어떤지 잘 모르고 지금보다 생각이 짧았던 때 서면으로 작성한 한마디"라며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오해의 소지가 있었던 것 같다. 신중을 기해야 하는 워딩이었다"고 시인했습니다. 이어 "이틀 전 일어난 일을 모든 분과 같은 마음으로 지켜봤다. (인터뷰 내용은) 제 실수일 수 있지만 해프닝이었다"고 덧붙였죠.
동물·환경보호 등 사회 문제에 꾸준히 목소리를 내온 가수 이효리는 2012년 예능 프로그램 '힐링캠프'에서 "정치적인 발언을 하면 회사에 '입조심시켜라'라는 협박 전화가 온다"고 토로한 바 있는데요. 10여 년이 지난 최근도 비슷합니다. 그룹 몬스타엑스 멤버 민혁은 한 예능에서 "아이돌은 중립이어야 한다" 발언으로 웃음과 공감을 자아낸 바 있죠.
소속 연예인들에게 '정치적 발언을 삼가하라'고 당부하는 기획사들도 숱합니다. 신인 아이돌 그룹의 경우 라이브 방송을 진행할 때 매니저 등 회사 관계자가 카메라 앞에 자리 잡는 경우도 포착되는데요. K팝이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면서 해외 시청자들도 라이브를 시청하고 있을 만큼, 리스크 관리를 위한 겁니다.
선거철이면 수많은 스타가 대중에게 투표를 독려합니다. 이때 대다수는 정치색을 드러내기보단 신중한 인증 사진을 남기는데요. 빨간색, 파란색 등 원색 계열의 옷을 피하는 건 기본입니다. 사진을 흑백으로 편집해 게재한 이도, 손 부분을 가려 포즈에 대한 추측을 차단한 이도 있었죠. 특히 래퍼 겸 방송인 데프콘은 2022년 대선 투표를 인증하면서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 흰색, 검은색이 총출동한 완벽한 '중립룩'을 선보여 웃음바다를 만든 바 있습니다.
연예산업의 특성상 정치 성향을 드러내는 데엔 명확한 득은 없습니다. 과거 문화예술계를 강타했던 '블랙리스트' 사태만 떠올려봐도 오히려 실의 위험이 크죠. 소신 발언을 했다가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공포심리가 업계 전반에 확산해 있는 겁니다.
다만 최근 정치권에선 '정치인이 앞장서서 연예인의 발언을 과도하게 비난해선 안 된다'는 취지의 자성이 나옵니다. 가수 김윤아가 후쿠시마 오염수 관련을 했다가 "개념 없는 개념 연예인" 등 정치권의 공세를 받자, 김웅 국민의힘 의원 등은 "공인이 아닌 연예인이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밝힌 것을 공인이 정치인이 공격하는 건 선을 넘었다"고 지적했습니다. 8월 홍준표 대구시장이 김규리의 미국산 소고기 수입 비난 발언을 다시금 상기시키자, 김남국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정치인과 싸우지 왜 애먼 연예인한테 시비를 거는지 모르겠다"며 "정치권에서 정치인 블랙리스트 이런 것 진짜 하지 말자"고도 말했죠.
그간 정치·사회적 이슈에 특별한 반응을 내놓지 않던 연예계이기에, 이번 비상계엄 사태에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에 시선이 쏠린 건데요. 이는 이번 계엄령 사태의 후폭풍이 그만큼 거세다는 걸 방증하는 셈이겠죠.
물론 사뭇 다른 의견을 피력한 이도 있습니다. 뮤지컬 배우 차강석은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이후 인스타그램에 "간첩들이 너무 많아 계엄 환영한다. 간첩들 다 잡아서 사형해달라"고 말했는데요. 이 글이 논란이 되자 사과문을 올리고 "저급하고 과격한 표현을 사용한 부분은 매우 죄송하게 생각한다. 편협한 사고와 자신들만의 이득만을 추구하며 편 가르기에만 치중돼 있고 서로가 서로를 혐오하게 하는 요즘 시국과 국정 운영에 대해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며 "그 중심에 간첩들이 개입한 정황이 나오게 되면서 더 예민해졌던 것 같다"고 해명했습니다.
그는 "나는 국익에 해가 되는 간첩을 싫어하는 것이지, 윤 대통령을 옹호하는 것도 아니며 여러분을 혐오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 부탁드린다"고 덧붙였는데요. 네티즌 사이에선 계엄령의 여파가 연예계에도 적지 않게 미쳤다는 사실을 모르냐는 지적 등이 여전히 쏟아지고 있습니다.
일각에선 그를 향해 '비상계엄이 무효 되지 않았다면 당신이 SNS에 글을 쓸 권리도 침해받을 수 있었다'고 일침을 가했는데요. 실로 이번 포고령에는 계엄사령부가 집회·결사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 노동권 등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다고 명시됐습니다.
이번 비상계엄 사태는 의도치 않게(?) 연예계에도 큰 여파를 미쳤습니다. 정치적 중립을 고수해 오던 연예인들도 공개적인 비판을 쏟아내면서, 이번 사태가 사회 전반의 가치와 권리를 위협하는 사안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걸 체감케 했는데요. 더 나은 사회를 위한 진단과 논의가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