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헬스케어 산업의 핵심 요소인 데이터를 둘러싼 정부, 의료계, 시민사회의 견해차가 해소되지 않고 있다.
정부는 보건의료데이터를 미래 헬스케어 산업 육성에 활용할 주요 자원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의료계는 의료데이터 생산에 필수인 전문성과 인프라 구축 주체로서 권리를 강조한다. 환자단체와 시민사회계는 개인 건강정보의 영리적 활용을 경계한다.
11일 의료계에 따르면 내년부터 보건복지부의 ‘건강정보 고속도로’ 활용 의료기관이 대학병원과 종합병원은 물론, 동네 의원으로 대폭 확대된다. 환자가 ‘나의건강기록’이라는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본인 건강정보를 확인하고 원하는 의료기관으로 전송할 수 있는 서비스다.
올해 9월부터 상급종합병원 10개, 종합병원 12개, 병·의원 838개 등 총 860개 의료기관이 데이터 제공기관으로 참여해 본격 가동됐다. 내년엔 상급종합병원 21개, 종합병원 28개, 병·의원 210개 등 총 259개 기관이 데이터 제공 의료기관으로 추가 참여해 총 1263개로 늘어난다.
또 질병관리청, 국민건강보험공단, 건강보험심사평가원 등 3개 공공기관도 데이터 제공기관으로 참여한다.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 활성하된 ‘마이데이터’가 의료체계에도 도입되는 셈이다.
정부의 보건의료데이터 활용 정책은 ‘국민 편의’와 ‘국가 미래 먹거리’ 등 공공성에 방점이 찍힌다. 개인의 건강정보 접근성을 향상하면 중복 검사를 줄여 불필요한 의료비 지출을 막을 수 있다. 고령화와 만성질환자 증가에 대비해 예방적 건강관리를 보편화할 수도 있다. 또 익명화된 각종 영상, 진단, 약물 부작용 등의 정보는 정책 연구에 활용하거나 신약 및 신의료기술 개발을 앞당기는 재료가 될 수 있다.
이에 정부는 올 4월 국가통합바이오빅데이터구축사업단을 출범시키고 의료기관·건강검진기관과 협력해 일반인과 희귀·중증질환자들의 생체정보를 수집 중이다. 지난해 9월 의료기관에서 생산하는 핵심정보 14종 77개 항목과 각 데이터를 표준체계에 따라 교류할 수 있도록 형식, 규격 등을 정의한 ‘보건의료데이터 용어 및 전송표준’ 고시를 개정·발령하고 데이터 표준화 작업도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건강정보 데이터 권리에 대한 이견은 상당하다. 국민 건강정보를 주인 없는 공유자원으로 간주하고 전적으로 정부가 활용 방안을 주도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는 의견이 많다.
의료계는 데이터 관리자와 생산자로서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 병원 측은 의무기록을 디지털화해 기록·저장·전송하려면 EMR을 원내 도입해야 한다. 또 정보보안을 위한 시스템 유지·개선을 해야 하고, 원내 인터넷 인프라 운영을 위해 컴퓨터 등 장비도 주기적으로 보수해야 한다. 보건의료데이터는 병원이 이런 제반 비용을 투자하지 않으면 생산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의사들은 데이터 관리·생산에 대한 법적 의무를 부담하는 만큼 그에 합당한 권리도 인정받아야 한단 입장이다. 의료법에 따라 의사는 의무기록을 최대한 자세하게 기록해야 하고, 유출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의사가 환자 진료 후 전자의무기록에 서명을 남기지 않으면 형사처벌까지 받을 수 있다.
정부 정책에 의료계의 시선은 호의적이지 않다.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원의 ‘진료데이터에 관한 의사 인식조사’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 537명 중 과반인 281명(52.3%)이 정부의 보건의료데이터 표준화 정책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했다. 가장 큰 이유는 환자 개인정보 유출 시 책임부담(52.7%)이다. 또 의사 자율성 훼손(48.8%) 우려도 적지 않았다. 응답자들은 정부가 의료데이터 생산자로서 의사 권리를 보장(57%)하고, 의료기관에 개선된 EMR 사용을 위한 재정 지원(42.3%)을 해야 한다고 답했다.
시민사회계는 환자 데이터는 오직 환자의 것이라며 정부와 의료계 의견에 모두 반대하고 있다. 정부가 민감한 국민의 개인정보를 산업적 수단으로 활용하려 한다며 ‘의료 민영화’ 시도라는 날 선 비판도 제기하고 있다.
김재헌 무상의료운동본부 사무국장은 본지와 통화에서 “보건의료데이터 권리는 오직 환자 개인이 가지고 있으며 의료기관이나 정부가 어떤 권리나 활용 방안을 주장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고 선을 그었다.
이어 그는 “보건의료데이터가 유출돼 문제가 생기면 가장 큰 타격을 입는 쪽은 병원도 의사도 아닌 환자 개인”이라며 “환자의 민감한 데이터는 불가피한 경우에만 포괄적 동의가 아니라 일일이 개별 동의를 거쳐 활용돼야 한다”고 말했다.
김 사무국장은 “정부는 보건의료데이터를 활용해 국민의 편의를 높인다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이런 정책을 가장 바라고 있는 쪽은 국민이 아니라 보험사, 제약사 등 민간 영리 기업들”이라며 “기업 손에 들어간 데이터는 보험 가입 거부, 보험금 지급 거부, 제약사 영업 등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될 것이 불 보듯 뻔하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