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창] ‘적당히’

입력 2024-12-12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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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택 연필뮤지엄 관장

예로부터 일본에는 ‘적당히’라는 말이 있었다. 적당히는 완벽하게 할 수도 있지만 어느 정도 미완의 단계에서 의도적으로 멈추고 끝낸다는 뜻이다. 이러한 이념을 마케팅전략으로 쓰는 브랜드가 MUJI(無印良品·상표 없는 좋은 상품)다. 이곳의 상품은 ‘이 정도로 충분하다’라는 관점의 적당한 디자인을 지향한다. MUJI는 ‘적당히’라는 개념을 높이 평가하지만 상품의 마감상태는 완벽함에 다가가 있다. ‘적당히 철저히’라고나 할까?

MUJI의 상품철학은 ‘비움, 단순함, 평범함’이다. 화려함, 복잡함, 강렬함과는 거리가 멀다.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 텅 빈 그릇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가 들어갈 수 있는 가능태다. 지나친 장식이나 디자이너의 개성을 가급적 배제하고 사물의 본질을 중시하는 마이너스 미학이다. MUJI가 지향하는 적당함은 다도가 지향하는 간소함이나 고요함과도 연결되어 일본의 문화적 전통이 되고 있다.

동아시아에 널리 퍼진 선불교는 참선수행을 통해 정신의 고양을 추구했다. 차를 마시고 밥을 먹는 일상의 활동을 통해서도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다. 여기서 유래한 말이 일상다반사(日常茶飯事)! 승려들이 수행의 일환으로 마시던 차가 일반대중에게 퍼져 생활의 도와 연결되어 다도로 발전했다.

일본 다도에서는 와비차의 정신을 중시한다. 와비(わび)는 ‘간소하고 차분한 아취’를 말한다. 와비차란 특별한 차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차를 마실 때의 소박함과 차분함 같은 태도를 말한다. 족자 하나와 꽃 한 송이가 꽂힌 꽃병 외엔 이렇다 할 장식이 없는, 다다미 두 장 면적의 작은 다실에서 평범한 다기들을 사용해 차를 마신다.

차를 마시는 것은 단순히 마시는 행위가 아니라 정신적 수양을 위한 것이다. 다도는 비움이다. 마음속의 동요나 삿됨이 없는 청정의 상태를 지향하는 것이다. MUJI는 상품이라는 물질에 단순함과 적당함이라는 정신을 내포하고 있다.

우리 문화재에 가득 채우면 술이 바닥으로 빠져나가는 술잔이 있다. 가득 차는 것(盈)을 경계(戒)하는 술잔(杯), 계영배(戒盈杯)다. 대기압과 중력의 상관관계를 이용한 이 잔은 잔의 가운데나 옆 부분에 관이 달려있다

잔에 붓는 술이 잔 높이의 7부인 관 꼭대기에 이를 데까지는 잔에 술이 그대로 담겨있지만, 이 지점을 넘어서면 술이 밑바닥으로 빠져나간다. 잔에 담긴 술과 관 속의 압력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술이 빠져나가면 관 내부는 진공상태가 되어 잔 안의 남은 술도 모두 관 속으로 빨려 들어가 빠져나간다. 심하게 취했다면 이 7부 높이를 가늠하지 못해 잔이 넘치도록 술을 따를 것이다. 결국 잔은 비게 된다. 취하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마시라는 술잔이다.

계영배는 최인호의 소설 ‘상도’를 통해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다. 소설의 주인공 임상옥은 스승이었던 석숭스님에게 이 잔을 물려받으며 인생 최후의 위기를 넘긴다. 수익이 많이 생길 때 더 조심하라는 가르침이었다. 과유불급(過猶不及)!

우리도 ‘적당히’라는 말을 자주 쓴다.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는 부정적인 의미일 때가 많다. 특이한 점은 ‘적당히’를 못마땅해하면서도 마무리는 적당히 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이 또한 경계할 일이다. ‘적당히’의 본뜻은 ‘합당하다, 알맞다, 꼭 들어맞다’라는 뜻으로 때와 장소에 맞게 적당히 사용해야 한다. 오늘 저녁식사 때 잔에 술을 7부만 채우면서 ‘적당히’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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