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계엄 사태가 짓밟은 건 경제뿐 아니다. 공직자들의 자존심도 짓밟았다. 공직자들이 자존심을 짓밟히고, 자긍심을 잃는단 건 정부가 무능해짐을 의미한다.
윤석열 정부에서 공직자들의 자존심이 짓밟힌 과정은 세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출범 초다. 몇몇 장관은 새 정부 출범, 장관 취임과 동시에 공직자들에게 반성을 강요했다. 초기 윤석열 정부는 ‘문재인과 거꾸로’에 집착했다. 성과와 무관하게 문재인 정부에서 추진된 모든 정책을 실정, 그 과정에 참여한 공직자들을 적폐로 몰았다. 능력을 인정받아 문재인 정부에서 승승장구한 공직자들은 나라를 망쳤단 오명을 뒤집어쓰고 좌천되거나 경질됐다. 몇몇 부처는 감사·수사 표적이 됐다.
윤 대통령은 수시로 공직자들을 공개 질책했다. 주로 ‘대통령이 경제 살리겠다고 고군분투하는데, 공직자들이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취지였다.
둘째, 출범 2년차 이후다. 지난해부터 대통령실은 공직자들을 속된 표현으로 쥐어짰다. 정체가 불분명한 이념 편향적 정책과 ‘뜬금포’로 발표된 즉흥적 정책들은 여론의 지지를 못 얻었다. 이로 인해 정부에 비판적인 보도가 나올 때면 대통령실은 각 부처에 설명자료 배포와 브리핑을 독촉했다. 때로는 보도자료, 브리핑문을 대통령실 직원이 ‘첨삭’했다. 대통령실 첨삭을 거친 보도자료, 브리핑문은 대통령 성과를 앞세운 ‘용비어천가’가 됐다. 정책을 알려야 할 보도자료, 브리핑이 윤 대통령 개인의 홍보수단으로 전락했다. 그런데도 여론은 더 악화했다. 윤 대통령은 또 정부의 소극성을 탓하며 정부부처에 대한 통제 강도를 높였다.
무엇보다 윤 대통령이 국정과제 추진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됐다. 지난해 예정됐던 정부 연금개혁안 발표는 대통령실 개입으로 올해로 미뤄졌다. 그 결과로 임기 내 연금개혁은 현실적으로 어렵게 됐다. 의·정 갈등 국면에서는 윤 대통령이 허울뿐인 감투를 쓴 ‘일개 전공의’와 독대했다. 보건의료 정책에서 보건복지부는 협상력을 잃었다. 전공의들 관점에서 대통령, 여당 대표와도 독대가 가능한 마당에 ‘실권 없는’ 복지부와 협상을 이어갈 필요가 없었다.
대통령발 악재가 터질 때마다 공직자들은 푸념했다. 자신들이 뭘 하는지도 모른 채 소모됐다.
셋째, 현재다. 수십 년간 공직에 몸담았던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 최상목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조태열 외교부 장관, 조규홍 복지부 장관 등 관료 출신 국무위원들은 졸지에 ‘계엄 공범’이 됐다. 비상계엄 선포에 반대했음에도 ‘계엄을 못 막았다’는 비판을 받는다. 주요 군 지휘관들은 국회와 선거관리위원회를 장악하되 물리력을 행사하지 않는 ‘소극적 항명’으로 계엄 해제에 일조했으나, 계엄 참여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영문도 모른 채 국회와 선관위에 투입됐던 현장 계엄군들도 마찬가지다. 관료들과 군의 사기는 바닥에 떨어졌다.
이렇게 공직자들의 자존심을 짓밟는 과정이 반복되면, 남은 이들도 실의를 느끼고 공직을 떠난다. 그 결과로 시간이 흐를수록 정부는 무능해진다. 이미 정부는 흔들리고 있다. 능력을 인정받아 전 정부에서 핵심 보직을 꿰찼던 공직자들은 정권교체와 함께 비자발적으로 공직을 떠났다. 여기에 자발적 퇴직인 의원면직도 매년 급증하고 있다.
이게 끝이 아니다. 가장 큰 위기는 헌법재판소의 탄핵 결정 이후다. 탄핵소추가 기각돼 윤 대통령이 복귀하든, 인용돼 정권이 바뀌든, 정책 실패와 계엄·탄핵 사태의 책임을 공직자들에게 묻는다면 공직자 이탈과 남은 공직자들의 보신주의는 더 심해질 것이다. 앞으로 필요한 건 공직자들에 대한 관용과 포용이다. 금이 간 벽은 적은 비용으로 보수할 수 있지만, 무너진 벽은 새로 지어야 한다. 여기에는 더 큰 비용,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