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시각] 은행권, 전쟁중 장수 바꾼 까닭

입력 2024-12-23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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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초희 부국장 겸 금융부장

새 CEO에 실적위주 영업통 배치
기존 수익모델 벗어나 혁신 추구
전통 가치와 디지털 결합이 과제

당태종 이세민은 태자였던 형을 죽이고 황제에 오른 인물이다. 그가 죽인 형에게는 위징이라는 책사가 있었는데 일찌감치 이세민의 위험을 감지하고 태자에게 “이세민을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고 간언했던 인물이다. 황제에게는 잡아 죽여 마땅치 않은 인사인데 뜻밖에도 위징을 불러 중책을 맡기는 파격인사를 단행했다. 위징은 그 뒤로 여섯 명의 군주를 보필하면서 목에 칼이 들어와도 직언을 하는 역사의 충신으로 기록에 남았다.

‘파격인사’라는 말이 신문 지상에서 흔히 사용되는 표현이긴 하지만 안에 갈무리한 뜻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일반적인 관행이나 기존의 체계를 깨뜨리는 예상치 못한 인사 조치를 말하는데, 거대 이익집단인 기업에서 이를 실행에 옮기는 건 웬만큼 배포가 있지 않고서야 쉽지 않은 일이다. 파격인사라는 말이 강렬한 카타르시스를 줄 때는 이런 위험한 선택이 위징의 등용처럼 짜릿한 성공으로 되돌아왔을 때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은행권을 강타한 최고경영자(CEO) 인사는 의미가 크다. 5대 시중은행에서 신한을 제외한 4곳의 은행장이 전격 교체돼서다. 숫자도 숫자지만 이번 인사에 파격이라는 말이 붙은 건 ‘비은행권’, ‘영업력’이라는 두 가지 키워드 때문이다. 바뀐 은행장들의 면면을 보면 한 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시대가 오는 것 같다. 관리와 감독, 리스크 관리를 강조하던 시대는 가고 영업과 실적을 중시하는 시대가 왔다는 얘기다.

KB국민은행은 이환주 KB라이프생명 대표를, 하나은행은 이호성 하나카드 사장을, 농협은행은 강태영 NH농협캐피탈 부사장을 행장으로 앉혔다. 모두 비은행 계열사 출신이다. 정진완 우리은행장 내정자는 현직 중소기업그룹장이다. 유일하게 연임에 성공한 정상혁 신한은행장은 11년간 영업 일선을 누빈 영업통이다.

전통적으로 은행장은 리스크 관리에 능한 사람, 관리와 감독에 뛰어난 사람이 맡았다. 금융 위기를 겪으며 더욱 그랬다. 그러나 이제는 영업 실적이 모든 조건을 압도하는 시대가 됐다. 이환주 내정자는 생보사 합병으로 순익을 90% 이상 끌어올린 인물이다. 이호성 내정자는 카드 상품 하나로 45%의 실적 개선을 이뤄낸 대표적인 영업전문가이다.

비즈니스 세계에서 영업맨들은 여러 고비의 순간에 회사를 구해내고 역사에 이름을 남겨왔다. 스타벅스를 글로벌 프랜차이즈로 길러낸 하워드 슐츠는, 2008년 금융위기 당시 위기가 찾아오자 다시 회사로 복귀해 재건하는 데 성공했다. 부진한 매장을 폐쇄하고, 고객 경험에 초점을 맞추고, 디지털 결제와 모바일 주문 시스템을 도입하는 과감한 조치들은 25살 때부터 영업맨으로 현장을 뛰었던 경험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은행들이 영업에 방점을 찍고 있는 건 위기를 예상해서다. 금리는 계속 내려갈 전망이고 비은행 금융사들의 약진이 만만치 않다. 핀테크 기업들의 등장으로 은행의 독점적 지위도 흔들린다. 1990년대 중반 전국 곳곳에 지점을 내고 예금을 끌어모으던 시절의 영광은 이제 옛말이다. 영업을 잘해도 살아남기 어려운 시절에 영업을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다.

새로운 시대의 은행장에게는 디지털 전환과 플랫폼 혁신이라는 과제가 기다린다. 이제 은행은 예금·대출의 중개기관이라는 전통적 역할을 넘어서야 한다. 부동산 거래부터 자산관리, 생활금융에 이르기까지 고객의 모든 금융생활을 책임지는 종합 플랫폼이 돼야 한다. 그래서 비은행 계열사 출신들이 대거 등용된 것이다. 이들은 영업 일선에서 단련된 실력과 함께 새로운 사업 영역을 개척한 경험까지 갖췄다.

“나는 나대로 혼자서 간다”는 말을 가슴에 품고 64세에 뒤늦게 등단한 일본의 작가 와카타케 지사코처럼, 새로운 은행장들도 관행과 관례를 벗어던진 채 새로운 길에 도전하게 됐다. 그들이 선택한 길이 맞는지는 시간이 지나봐야 알 것이다. 다만 어떤 길이든 혼자서는 갈 수 없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전통적인 은행의 가치와 새로운 시대의 요구를 조화시키는 지혜가 필요하다. 이것이 새로운 영업통 시대를 맞은 은행권에 거는 기대이자 우려다. cho77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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