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이기에 받은 기회들을 놓치지 않고 증명해냈습니다.”
1991년 설립된 한국금융연구원은 대한민국 금융의 대표적인 싱크탱크이자 금융권 인재 배출의 산실로 통한다. 금융정책의 방향을 제시하는 연구자료 뿐 아니라 금융권을 이끌어가는 리더들을 다수 배출해낸 것으로도 명성이 높다.
하지만 보수적인 금융권에서도 특히 연구소는 여성 인재들에게 있어서는 구조적으로 ‘이중 유리천장’을 뚫어야 하는 험난한 곳이었다. 상대적으로 여성들에게 인기가 없는 ‘금융 전공 필수’라는 제약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같은 허들을 넘고 한국금융연구원 최초로 여성 선임연구위원에 이름을 올린 주인공이 이수진 금융소비자연구실장이다.
2022년 유리천장을 깨고 첫 여성 선임연구위원이 된 이 실장은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지원할 당시 금융연구원에 여성 연구원이 워낙 없다 보니 여자를 꺼린다는 괴소문도 있었다”면서 “들어와서 보니 여성 차별은 전혀 없었다”며 웃었다.
그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오히려 기회를 얻은 일도 있었다고 밝혔다. 정부와 공공기관에서 다양성 차원의 자문을 요구하면서 여성 연구자로서의 존재감이 커졌다는 설명이다.
이 실장은 “사외이사나 각종 위원회에서 성별 비율을 맞추다 보니 같은 경력의 남성 연구원보다 훨씬 더 바빴다”면서 “이런 자리에서 잘못하면 여성에 대한 평판으로 이어질까 봐 최선을 다했다”고 했다.
입사 초기부터 쉴틈없이 다양한 회의에 참석하며 경험을 쌓았다. 현재도 금융위원회 옴부즈만 위원, 금융감독원 마이데이터 허가 외부평가위원회 위원 등 금융당국과 공기업, 민간 기업을 넘나들며 14개의 협의회에서 자문을 맡고 있다.
이 실장은 연구원 초창기 시절을 떠올리며 “처음 회의에 참석했을 때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종종 민망한 상황을 겪었다”고 회상했다. 당시 외부 참석자가 그를 석사급 연구원으로 착각해 인사를 무시했던 일도 있었다. 그는 “정부 회의에 참석하면 혼자 여자인 경우가 많았고, 나이가 어린 편이라 저를 보며 ‘저 젊은 여자는 누구지?’라는 호기심 어린 눈빛을 받곤 했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이 실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실력을 통해 전문성을 증명해나갔다. 그는 “어디 가서 기가 죽는 성격이 아니다 보니, 속상해하기보다는 ‘잘 몰라서 그러겠지’ 하고 웃어넘겼다”면서 “내 차례가 되면 위축되지 않고 준비한 내용을 자신있게 발표했다”고 회고했다.
이 실장은 현재 금융위가 추진 중인 제4 인터넷전문은행 관련 연구를 주도하고 있다. 지난 6월에는 ‘인터넷전문은행 도입 성과·시사점 세미나’에서 연구 결과를 발표하며, 금융당국과 함께 인터넷은행의 성장성, 수익성, 전산 안전성에 대해 평가하고 논의했다.
그와 인터넷은행의 인연은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첫 인터넷은행 도입을 위한 태스크포스(TF) 회의에 참석해 연구를 맡았던 그는 “데이터를 다뤄본 경험 덕분에 기술기업의 신용평가 모델을 다루는 은행 평가 시스템을 구축하는 작업을 맡았었다”고 했다. 이어 “너무 큰 일을 맡아 체력적으로 힘들었지만, 그 과정에서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며 “돌고 돌아 10년 만에 제4 인터넷은행 연구를 맡아보니, 그때보다 한층 성장했음을 느꼈다”고 설명했다.
이번 연구는 인터넷은행의 성과를 냉정하게 평가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이 실장은 “10년 전에는 처음 도입하는 단계였기 때문에 반드시 성공적으로 추진해야 한다는 분위기 속에서 연구를 진행했다”며 “이번에는 그동안의 운영 성과와 한계를 객관적으로 돌아보는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이 실장이 처음 금융연구원에 지원할 당시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여성들에게 인기가 있는 노동경제학이나 거시경제학 전공자를 채용했다. 여성 지원자들이 많을 수 밖에 없었다. 반면 금융연구원의 채용 필수 조건인 금융을 전공하는 여성인재는 상대적으로 적었다. 하지만 금융연구원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이 실장은 “여자 박사가 3명이던 시절이 있었지만 현재 8명이 됐다”고 전했다. 여성 연구원들이 늘어나면서 그는 점심 모임을 정기적으로 가지며 팀워크를 강화하는 노력도 기울이고 있다.
이 실장은 유리천장이 확실히 깨지려면 여성 인재가 더 많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과거에는 승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지금은 정부 기관에서도 여성 국장과 과장들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라며 “10년 후에는 어떤 회의에 들어가면 남성이 소수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고 말했다.
이 실장이 현재 주목하는 연구 분야는 ‘불법사금융’이다. 그는 “최근 불법사금융에 대한 연구를 많이 하고 있다”면서 “그동안 대부업 관련 정책 연구를 많이 해왔는데, 내년에는 대부업 정책 변화의 과정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려 한다”고 밝혔다.
이 실장은 후배들에게 ‘네트워킹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연구원의 경우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협업하는 일이 많아 다양한 사람들과의 관계가 성공의 열쇠가 된다는 것이다. 그는 “경력이 쌓이다 보면 10년 후에 예전에 만났던 업계 사람들을 다시 만나게 된다. 그때마다 ‘조금 더 친하게 지낼 걸’ 하고 후회하기도 한다. 모든 사람과 친해지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