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임 후 행보로 더 찬사받아
제39대 미국 대통령을 역임한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29일(현지시간) 조지아주 고향 마을 플레인스 자택에서 별세했다. 향년 100세.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카터재단은 성명에서 카터 전 대통령이 가족들이 있는 가운데 이날 오후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다고 밝혔다.
카터 전 대통령은 2015년 흑색종이라는 암 진단을 받고 투병했으며, 이후에도 암이 뇌로 전이되는 등 여러 가지 건강 문제를 겪었다. 미국 대통령 중 가장 장수한 카터는 지난해 2월에는 연명 치료를 중단하고 자택에서 호스피스 완화 의료 서비스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공개했다.
카터는 냉전 시기였던 1977~1981년 대통령 재임 중에는 실업과 물가와 같은 경제 문제와 대외 악재까지 겹치면서 인기 없는 현직 대통령이었지만, 퇴임 후 봉사와 민간 외교관 활동으로 미국 안팎에서 박수받았다.
카터는 1924년 10월 조지아의 작은 마을인 플레인스에서 땅콩 농장과 종자 공급 사업을 하던 부친과 간호사인 모친 사이 4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장교로 임관해 해군 잠수함 부대에서 복무했다. 하지만 부친이 암으로 사망하자 전역 후 조지아로 돌아와 부친이 운영하던 농업 사업을 물려받았다. 이후 조지아주 상원의원을 거쳐 1970년 조지아 주지사에 당선됐다.
1976년에는 대통령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했다. 베트남 전쟁과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의 사임을 불러온 워터게이트 사건을 계기로 기성 정치에 대한 국민적 환멸과 신예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면서 당시 현직 대통령이었던 공화당 소속 제럴드 포드를 꺾고 대통령에 올랐다.
그는 재임 기간 ‘인권 외교’를 표방했다. 1978년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역사적인 화해로 이뤄진 ‘캠프 데이비드 협정’이 대표적 외교적 성과로 꼽힌다. 1972년 닉슨 전 대통령이 전격적으로 중국 방문해 포문을 연 미·중 관계 개선 흐름을 이어받아 1978년 12월에 중국과의 국교 수립을 발표했다.
하지만 재임 당시 대외 악재가 이어지면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1978년 파나마운하 통제권을 파나마에 넘긴 것이 대표적이다. 당시 카터 대통령은 ‘공정성’을 이유로 이 같은 결정을 내렸지만, 미국 내에서는 자국의 이익에 반하는 결정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특히 임기 말에는 2차 오일 쇼크, 이란의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사태를 겪으면서 지지율이 현저하게 떨어졌다. 오일 쇼크 영향으로 1977년 1월 취임 당시 5.2%였던 인플레이션은 1979년 말에는 13.3%까지 치솟아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1979년 이란 혁명 이후 학생들이 테헤란의 미 대사관을 점거해 53명의 미국인을 인질로 삼자 이듬해 특공대를 투입한 구출 작전을 감행했지만 실패하면서 거센 비난을 샀다. 당시 카터 대통령은 이란과의 단교를 선언하고 경제 제재를 발동했으며, 현재까지도 양국 사이는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 결국, 1980년 대선에서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로널드 레이건에게 패배하며 역대 대통령 중 처음으로 재선에 실패했다.
카터는 “대통령직 이후를 재창조했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퇴임 이후 업적이 더 빛을 발한 대통령이었다. 그는 퇴임 후 조지아로 돌아가 1982년 비영리 단체인 ‘카터센터’를 설립했다. 이를 통해 외교에 힘쓰며 한반도와 중남미 등에서 분쟁 조정과 민주화를 촉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카터 전 대통령은 한반도와도 인연이 깊은 대표적인 미국 대통령으로 꼽힌다. 박정희 군사정권 하의 한국 인권 상황을 문제 삼아 주한미군의 단계적 철수를 대선공약으로 제시, “내정간섭을 중단하라”고 반발한 박정희 정권과 각을 세우기도 했다.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인 1994년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IAEA) 탈퇴를 선언하자 특사 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을 만났다. 그는 2010년에도 다시 방북해 불법 입국 혐의로 복역 중이던 미국인의 석방을 끌어냈다.
1959년 쿠바혁명 이후 미국 전·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2002년 쿠바를 방문했다. 이외에도 에티오피아, 수단, 아이티, 세르비아, 보스니아 등 국제 분쟁 지역에서 평화적 해결책을 찾기 위해 중재자로 나섰다. 그는 인권·평화 메시지를 전하고 사회 운동에도 힘쓴 공로를 인정받아 2002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그의 배우자인 로잘린은 지난해 11월 96세에 별세했다. 로잘린이 별세하기 전 두 사람은 미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인 77년 동안 결혼 생활을 한 대통령 부부였다. 슬하에는 잭(78)·칩(74)·제프(72)·에이미(68) 등 3남 1녀와 11명의 손주, 14명의 증손주가 있다.
그의 장례식은 국장으로 치러진다. 카터센터는 그의 공개 추모 행사가 애틀랜타와 워싱턴D.C.에서 열릴 예정이며, 이후 플레인스에 비공개로 안장될 예정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