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연말은 수심이 가득합니다. 이미 대통령 탄핵 정국으로 충격과 혼란에 빠져 있던 시민들이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를 겪게 되면서 상심이 깊어진 건데요. 곳곳에서 "다시는 이런 연말을 보내고 싶지 않다"는 호소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비극적인 사고로 목숨을 잃은 희생자들은 총 179명입니다. 승객 175명 전원이 사망하고 승무원 2명 외 생존자가 나오지 않으면서, 이번 사고는 국내에서 발생한 항공기 사고 가운데 가장 많은 인명피해를 낸 참사로 남게 됐죠.
안타깝게 숨진 희생자들을 추모하려는 조문 행렬도 이어졌습니다.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한 합동분향소가 전국 곳곳에 마련됐는데요. 추모 분위기 한편으로 참담한 잔상에 따른 심리적 어려움을 호소하는 이들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12·3 비상계엄 사태로 인한 충격과 혼란이 가시기도 전에 대형 참사가 발생한 만큼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고 있다는 시민들의 반응이 이어지는데요. 전문가들은 자칫하면 사회 전반에 집단적 트라우마가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태국 방콕에서 출발해 무안공항으로 향하던 제주항공 7C2216편은 29일 오전 9시 3분께 랜딩기어(비행기 바퀴)가 펼쳐지지 않은 상태에서 무안공항 활주로에 착륙을 시도하다가 공항 시설물과 충돌해 기체 대부분이 화염에 휩싸이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항공기 기체는 충돌 이후 꼬리 칸을 제외하면 형체가 남지 않을 정도로 불에 탔죠.
이 사고로 승객 175명 전원과 조종사·객실 승무원 각 2명 등 179명이 현장에서 사망했습니다.
안타까움을 더한 건 가족 간 참변이 유독 많아 보였다는 겁니다. 패키지 여행을 주로 다니는 전세기 특성상 가족여행을 다녀오던 승객들이 많았기 때문으로 풀이되죠.
구조 당국에 따르면 전남 영광군 군남면에 거주하는 A(80) 씨 일가족 9명이 이날 오전 무안공항에 착륙 중 사고가 난 제주항공 7C2216편에 탑승한 것으로 파악됐는데요. A 씨는 181명 탑승자 중 최연장자로, 팔순 잔치를 위해 자녀들, 친인척들과 함께 태국 방콕 여행을 마치고 귀국하기 위해 사고 여객기에 탑승했습니다.
부모와 자녀, 손자 손녀까지 3대 일가족이 참변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60대 남성 B 씨는 가족 여행차 태국으로 떠난 가족들의 주검을 맞이해야 했습니다. 형수와 그의 딸 부부, 부부의 어린 미성년 자녀들까지 3대에 걸친 일가족 5명이 사고 비행기에 타고 있었다고 합니다.
며느리들끼리 매년 해외여행을 함께 다녀올 정도로 화목했던 가족도, 2021년생 3세 남아도 참변을 피하지 못하면서 안타까움을 자아냈죠.
국가교통부에 따르면 이날 오후 2시 30분 기준 사망자 179명 가운데 174명 신원이 확인됐는데요. 국토부 등 사고 수습 당국은 시신을 무안공항 격납고에 마련한 임시 안치소 냉동시설에 보존 중이며, 수사기관의 검시 등 절차를 마치는 대로 가족에 인도할 방침입니다.
일부 유가족은 시신을 인도받아 각각 연고지 장례식장에서 장례 절차에 들어갔지만, 온전한 상태로 수습된 시신은 소수에 불과해 유가족들이 모두 시신을 인도받기까지는 시일이 소요될 것으로 보이죠.
정부는 내년 1월 4일까지 일주일간을 국가애도기간으로 정했습니다. 사고 현장과 전남, 광주, 서울, 세종 등 17개 시도에 합동분향소를 설치하고요. 전 부처와 지방자치단체·공공기관들은 조기를 게양하고, 공직자들은 애도 리본을 달게 되죠.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후폭풍도 급격히 확산했습니다. 사고 기종인 보잉 B737-800 항공기(제주항공 소속)가 또다시 랜딩기어 이상으로 회항하면서 국내 저비용 항공사(LCC)에 대한 시민들의 불안감과 불신이 증폭된 겁니다.
항공업계에 따르면 30일 오전 6시 37분께 김포공항에서 제주도로 출발한 제주항공 7C101편이 이륙 직후 랜딩기어에서 이상이 발견돼 출발 50분 만에 다시 김포공항으로 돌아갔습니다.
해당 여객기에는 승객 161명이 탑승한 상태였는데요. 회항한 항공기는 오전 7시 25분경 김포공항에 내렸으며 항공기 교체 작업이 이뤄졌죠. 이날 회항한 기종은 보잉의 B737-800으로, 전날 참사가 벌어진 기종과 같습니다. 제주항공은 41대의 기단 가운데 39대를 이 기종으로 운영하고 있죠.
불안감이 거세지면서 항공권을 취소하는 움직임도 대거 일었습니다. 참사 발생 하루 만에 제주항공 항공권 취소 건수는 6만8000여 건에 달했는데요. 국제선 예약 취소는 3만4000여 건이었고 국내선은 3만3000여 건이었다고 합니다. 예약 취소 대부분은 참사 당일인 29일 오전에 시작됐죠.
한 네티즌은 이날 여행 카페에 "밤새워서 일정 짜고 다 알아봤는데, 어제 새벽까지 고민하다 결국 (가족여행 계획을) 취소했다"며 "처음으로 베트남 다낭에 가는 거라 기대 많이 했지만 제가 가서 온전히 즐길 수 있을지 고민이 됐다. 제가 예약했던 비행기도 제주항공"이라고 밝혔습니다.
여행을 고민 중이라는 또 다른 네티즌은 "열심히 정보 수집해 가면서 여행 준비 중이었는데 갑작스러운 비극에 가족들도 불안해하고 있다"며 "여행을 포기하자니 수수료 문제도 있고, 또 시간 맞춰 갈 수 있는 상황도 아니라 포기하기 힘들지만, 너무 큰 사고가 나서 심리적 압박감이 상당하다"고 털어놨죠.
불안감이 극심한 탓일까요. 온라인상엔 각종 가짜뉴스도 나돌았습니다. 무안공항 인근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는 시민이 사고 모습이 담긴 영상을 언론에 제보했다는 이유로 음모론이 시작된 게 대표적입니다. '사고가 날 것을 미리 알았던 것 아니냐'는 억측이었죠.
여기에 희생자들을 비롯해 기체를 조종한 기장과 부기장을 향한 허위사실 및 2차 가해성 게시물도 확산했습니다. 입에 담기도 꺼려지는 조롱과 혐오발언도 포착돼 눈살을 찌푸리게 했습니다.
전남경찰청 사이버범죄수사대는 희생자를 겨냥한 모욕성 인터넷 게시글에 대해 허위사실 유포 및 명예훼손 등 혐의로 수사한다고 30일 밝혔습니다. 피해자의 신고가 없더라도 온라인 커뮤니티 등 모니터링을 통해 적극적으로 사법처리한다는 방침이죠.
31일엔 모욕 등 혐의로 국내 한 온라인 커뮤니티 이용자를 추적 중이라고 전했는데요. 신원이 아직 특정되지 않은 이 네티즌은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당일인 29일 '무안공항 유가족들만 횡재네요'라는 제목의 게시물을 인터넷에 올려 유가족을 모욕한 혐의를 받습니다. 경찰은 피해자의 신고 없이 범죄 사실을 자체적으로 인지해 이 사건 수사에 착수했으며, 참사 유가족을 조롱하는 악플러 등에 대해 이후에도 적극적으로 처벌한다는 방침입니다.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와 관련해 부적절한 발언으로 지탄받은 사례도 발생했습니다. 공차의 한 가맹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고 밝힌 C 씨는 최근 X(옛 트위터)에 "이게 지금 아르바이트생한테 할 소리냐"며 관리자에게 받은 카카오톡 메시지를 공개했는데요. 이 내용에 따르면 관리자 D 씨는 "오늘 비행기 터진 거 봤지? 방학 때 해외 가는 놈들 좀 있던데 추락할 일 생기면 아빠, 엄마보다 나한테 먼저 '알바 구하세요' 하면서 카톡 보내라. 결근 안 생기게"라는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해당 메시지가 논란을 일으키며 불매 운동 조짐까지 보이자, 공차코리아는 공식 홈페이지에 사과문을 올리고 "가맹점에서 발생한 부적절한 발언으로 불편과 상처를 드린 점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드린다"며 "현재 이 사안을 엄중히 검토하고 있고 관련 직원에게 적절한 조치를 진행하고 있다. 이런 일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내부 관리 체계를 강화하고 개선책을 마련하겠다"고 고개를 숙였죠.
현직 대통령의 한밤중 갑작스러운 계엄령 선포, 곧바로 이어진 탄핵 정국, 그리고 일상을 덮친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로 시민들의 불안감은 극에 달한 상황입니다.
당장 비상계엄으로 트라우마를 호소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는데요. SNS를 통해 사진 및 영상이 급속도로 확산하면서 무장한 특수부대가 국회로 들어가는 모습 등이 또렷한 잔상으로 남은 바 있습니다. 온라인상에선 "경찰 버스가 보이면 심장이 빠르게 뛴다", "탄핵 가결 전 시위도 수차례 나간 적 있는데, 최근 뉴스만 보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비행기 환청이 들린다" 등 반응도 발견되는데요. 계엄부터 탄핵소추안 투표 불성립, 가결까지 급박한 상황이 전개될 땐 미처 느끼지 못했던 심리적 압박감이 뒤늦게 닥친 것으로 보입니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학과 교수는 연합뉴스를 통해 "계엄을 경험하지 못한 청년층도 관찰학습 효과에 따른 트라우마를 겪을 수 있다"며 "TV를 통해 본 장면들이 자꾸 떠오르면서 국회의사당이나 군인을 피하는 증상 등도 나타날 수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시민들 사이에선 트라우마를 자극할 수 있는 사고 사진이나 영상을 공유하는 걸 자제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한 네티즌은 "인스타그램, 스레드, X 등 각종 SNS와 온라인 커뮤니티에 사고 영상이 돌고 있다. 아무 생각 없이 스크롤을 내렸다가 참담한 현장 모습을 보고 말았다"고 성토했는데요.
전문가들도 사회 전반에 집단적 트라우마가 발생할 수 있다며 사고 영상 공유나 시청을 자제해야 한다고 당부했습니다.
전라남도의사회와 광주시의사회는 입장문을 내고 "사고 장면을 직접 목격하거나 영상으로 접한 사람은 2차 외상을 겪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면서 "정신적 트라우마는 장기적으로 심리적 건강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영상과 사진 공유 자제를 부탁한다"고 요청했고요. 한국트라우마스트레스학회장을 지낸 백종우 경희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도 페이스북을 통해 "가능한 한 빨리 정신건강 전문가의 심리적 응급처치가 유가족들에게 이뤄지길 바란다"면서 "언론에서 불필요하게 사고 장면을 반복적으로 방송하는 보도는 지양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백 교수는 31일 YTN라디오 '슬기로운 라디오생활'과의 인터뷰에선 "고인과 내가 직접적인 관련이 없더라도 많은 국민이 해외여행의 경험이 있고 미디어를 통해 사고 장면과 상황을 접하게 되면 간접 트라우마 외상으로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짚었는데요.
그는 "지속적으로 불면증을 겪거나 삶을 빨리 끝내고 싶은 생각에 빠져드는 등 경고 신호가 나타날 땐 적극적으로 치료하고 상담하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예방될 수 있어 초기에 자원을 집중해야 한다"고 조언했습니다.
특히 "고통스러운 분들은 오히려 절망하면 도움을 요청하지 않게 된다"며 "유가족분들은 진상 규명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자신이 도움받는 걸 많이 미루는 경우도 없지 않다. 오히려 초반에 적극적으로 도움을 받아야 이 긴 과정에서 의미를 찾고 더 회복할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질 거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죠.
재난 사고는 생존자, 유가족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심리적 영향을 미칩니다. 마음이 힘들고 괴롭다면 사고와 관련된 뉴스 기사, SNS 속 글과 사진, 영상 등에 지나치게 몰두하기보다 일상을 유지하는 데 힘써야 하는데요. 지인들과 대화하고 마음을 나누는 것도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