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섬주섬 음반과 응원봉을 챙겨 늦은 밤 혹은 새벽에 떠나는 자녀에게 건넨 부모님의 말 한마디. 시대마다 그 말의 경중(?)은 다르지만, 내 자녀라고 믿을 수 없는 부지런함에 눈을 흘기는 부모님의 진심이죠.
하지만 요즘은 그 물음에 당당하게 외치는 팬들인데요. “밥도 주고 간식도 주고 커피도 줘!”라고 말입니다. 이처럼 최근 아이돌의 음악방송 스케줄을 따라 ‘공방(공개방송) 뛰기’에 나서는 팬들의 대기 시간이 사뭇 달라졌는데요.
과거 1~2세대 아이돌 공방은 팬임을 증명할 수 있는 물품(최근 음반 또는 팬클럽 카드)을 들고 그저 기다렸는데요. 선착순이었기 때문이죠. 임의로 정해진 각 그룹의 대기열에 있다 보면 팬클럽 관계자(?)가 나와 번호(입장순서)를 부여했습니다. 공방 일정마다 그 인원 숫자는 달라졌고, 앞 순번을 차지하기 위해 더 빠르게 달려갈 수밖에 없었죠. 물론 더 가까이서 아이돌을 보고 싶은 마음도 포함됐습니다. 다시 재집합하는 시간까지는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지만, 대부분 학생이어서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은 터라 ‘무한 대기’를 택하는 경우가 많았는데요.
세대가 흐르면서 이 모습도 차츰 변화했습니다. 공카(공식카페) 댓글 선착순인 ‘댓림픽’에 이어 팬 플랫폼 서비스 등에서 미리 공방 인원을 ‘추첨’으로 정하기 시작했죠. 행운을 따낸 팬들이지만 무한 기다림은 계속됐는데요. 방송사 사정에 따라 아이돌 ‘사녹(사전녹화)’ 일정이 밀리며 벌어지는 일들이죠. 보고 싶은 가수를 위해선 여러 일정 변경에 군말 없이 그저 기다려야 합니다. 더군다나 아이돌 컴백 주나 시상식 같은 경우에는 저마다의 엄청난 무대 준비로 인해 사녹 일정이 자정이나 새벽에 진행되는 경우도 많은데요. 자리를 떠날 수 없는 팬들은 추위, 굶주림과 싸워야 합니다.
이런 기형적인 새벽 사녹이 반복되다 보니 팬들을 향한 아이돌의 마음이 ‘역조공’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게 된 건데요. 팬들이 좋아하는 가수를 위해 간식이나 선물을 보내거나 혹은 함께 촬영하는 제작진과 타출연진들에게도 도시락을 대접하는 것을 ‘조공’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조공 대상이 아이돌에서 팬들로 바뀐 거죠. 무한 애정을 보내주는 팬들에게 마음을 전하는 아이돌의 ‘역조공’이 하나의 이벤트가 됐습니다.
최근 무려 7년 만에 신곡을 발표한 그룹 빅뱅의 지드래곤(지디)도 역조공 이벤트를 벌였는데요. 지난달 20일 ‘SBS 가요대전’ 사녹에 참석한 팬들을 위해 핫팩, 공식 슬로건, 포토카드에 이어 지드래곤이 직접 만든 브랜드 피스마이너스원(피마원) 마스킹 테이프·스트랩·스카프를 제공했죠. 거기다 커피차와 간식차까지 등장했는데요. ‘역대급 역조공’에도 지디는 “일단 이거라도. 아직 시작도 안했…”이라는 문구와 함께 사인까지 덧붙였습니다. 타팬들 사이에서 또한 화제가 되며 “산타 수준”이라는 격한 반응이 나왔죠.
최근 연말 시상식이 이어지며 이처럼 ‘역조공’도 더 많아졌는데요. 지난달 29일 벌어진 무안공항 제주항공 참사로 이달 4일까지 국가애도기간으로 정해지며, 가요 연말 시상식이 ‘결방’됐습니다. 하지만 녹화 방송은 예정대로 진행됐죠. 이미 계획된 스케줄을 변경할 수 없었기 때문인데요. 방송 날짜는 미정이지만, 가수와 팬들은 이미 만났습니다.
이 연말 시상식 사녹에서 논란이 불거진 건데요. 시상식인 만큼 다수의 아이돌 그룹이 출연했고, 팬들 또한 다양하게 모였죠. 그렇기에 ‘비교’는 더욱 심해졌습니다. 타 아이돌이 준 ‘역조공’을 맨눈으로 마주하기 때문인데요.
이 과정에서 그룹 ‘에스파’가 논란의 중심에 섰습니다. 저마다의 ‘역조공’이 판치는 연말 시상식 세계에서 ‘무조공’을 택했거든요. ‘MBC 가요대제전’ 현장에서였죠.
밤새 기다린 에스파 팬들은 타 아이돌이 팬들에게 제공한 ‘역조공 간식’을 지켜보고만 있었는데요. 개인 무대뿐 아니라 단체 무대에서도 에스파 팬들에게 제공된 ‘역조공’은 없었습니다. 거기다 단체 무대 시작 전 팬들과의 대화에서 밖으로 나가질 못해 밥도 못 먹었다는 팬들에게 “김밥이라도 사오지”라고 답해 논란이 됐죠.
아무것도 먹지 못한 팬들을 향한 걱정이었겠지만, 이 발언이 그저 걱정으로만 들리지 않았는데요. 추운 맨바닥에서 무한 대기하고, 화장실도 제대로 못 가고, 끼니를 거르는 팬들에게 “김밥이라도 사오지”가 고깝게 들릴 수밖에 없었던 거죠. 더군다나 에스파가 신인 그룹도 아니고 사녹 환경이 어떤지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입장일터라 서운함이 더해졌습니다.
이에 타 아이돌 역조공 목록까지 공유됐는데요. 핫팩, 담요, 화장품, 간식, 도시락, 커피, 분식차, 포카 등이 증거사진(?)으로 나오며 반응은 더 격해졌죠.
하지만 에스파가 매번 이런 건 아닌데요. 앞서 에스파는 정규 1집 발매 당시 공방에 참여한 팬들에게 헤어물품, 음료, 샌드위치, 공방포카 등을 제공하는 혜자 ‘역조공’을 펼친 바 있죠. ‘역조공 대박’을 외쳤던 팬들이 이번에는 아쉬움을 표한 겁니다.
‘역조공 이벤트’는 과거에도 있었지만, MBC ‘아이돌 스타 선수권 대회(아육대)’가 촉발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무한 대기 방송’의 끝판왕이라는 아육대는 무려 이틀을 대기해야 하는 엄청난 일정이었죠. 이는 아이돌도 마찬가지였는데요. 다수의 아이돌이 참여하다 보니 아이돌 또한 ‘대기’를 했고 그 과정에서 더 힘든 팬들을 바라보게 된 겁니다. 온종일 그저 앉아서 응원을 보내는 팬들에게 간식과 음료수 등을 제공하던 것이 이제는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게 됐습니다.
그 당연한(?) 문화가 공방까지 이어지며, 팬들 또한 당연히 바라게 됐는데요. (인기 아이돌 입장에서는 감당 가능한 금액일지라도) 팬들을 향한 ‘따뜻한 마음’이 조금 버거워졌죠. 팬들 사이에서도 “당연한 듯 바라지 말자”, “역조공은 고마운 거지 당연한 것이 아니다”라는 의견이 나오며 정화 작업에 나섰지만, 의견은 엇갈리고 있습니다.
역조공을 하는 것도 정상, 역조공을 안 하는 것도 정상, 역조공이 없음에 서운한 것도 정상이라는 반응들 속 이 새벽 사녹과 공방이 만들어낸 피해자들이라는 의견이 더 큰 지지를 받는 중인데요. 뭐든지 ‘당연함’은 없다는 점도 덧붙여야 할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