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감 후] 은행 곳간 털면서 밸류업?

입력 2025-01-1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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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명절이 다가오면 반복되는 풍경이 있다. 자금난을 겪는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을 대상으로 은행권이 수십조 원에 달하는 지원 방안을 쏟아내는 일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KB국민·신한·하나·우리은행 등 주요 은행은 마치 누군가와 조율이라도 한 듯 나란히 15조1000억 원이라는 똑같은 규모의 지원금을 내놓았다.

고금리·고물가·고환율의 ‘3고’ 시대에 어려움을 겪는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에 대한 금융 지원의 필요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러한 지원이 ‘당연한 의무’로 고착화되고, 정부의 ‘지시’에 따라 획일적으로 이뤄지는 현실은 곱씹어봐야 한다.

만약 정부가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 등 대기업에 수조 원의 자금 지원을 강요한다고 생각해보자. 시장 경제의 원칙을 훼손했다는 비난이 들끓을 것이며, 한국 기업에 대한 국제적인 신뢰도 하락까지 감수해야 할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기업은 이윤 추구를 본질로 한다. 은행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유독 수출 중심 대기업의 이익 행위는 ‘국가 경제 기여’라는 명분 아래 긍정적으로 평가받는 반면 은행의 이익은 ‘탐욕’, ‘이자 장사’라는 부정적 프레임에 갇히는 경향이 있다.

은행권이 예대마진, 즉 금리 차를 이용해 비교적 안정적인 이익을 얻는 측면이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물론 이 부분에서도 부동산 시장의 구조적인 문제와 정부의 정책 실패를 무시하고 은행의 역할을 지나치게 단순화해 책임을 과도하게 부과하는 경향 또한 존재한다는 점은 차치하고서도 말이다.

은행의 정당한 이익 추구 행위를 ‘불로소득’으로 치부하거나, 이를 빌미로 정부가 은행을 마치 ‘곳간 열쇠’처럼 좌지우지하려 해서는 안 된다. 이는 정부가 야심 차게 추진 중인 ‘밸류업(기업가치 제고)’ 정책과도 정면으로 충돌한다. ‘기업 밸류업’은 자율적인 노력을 통해 기업 가치를 제고하고, 궁극적으로 자본시장 발전을 이끌어내겠다는 정책이다.

그런데 은행에 ‘획일적인 지원’을 강요하게 되면 이는 시장의 자율성을 침해하고, 기업의 책임 경영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마치 입으로는 ‘자율 주행’을 외치면서 정작 운전대는 정부가 쥐고 있는 것과 다름없는 모순적인 모습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런 행태들이 외국인 주주들의 외면을 불러올 수 있다는 점이다. 최근 만난 금융지주 한 관계자는 "외국인 투자자들은 한국 기업의 지배구조와 경영 방식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특히 민간 기업인 은행에 대한 정부의 과도한 개입에 많은 의문을 표시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실제 외국 투자자 입장에서 정부가 민간 기업의 경영에 지나치게 간섭하는 것은 투자 리스크를 높이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이는 한국 금융 시장의 매력도를 떨어뜨려 외국 자본의 이탈을 가속화할 수 있는 중대한 문제다. 장기적으로는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 증시 저평가)’ 현상을 심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은행의 사회적 책임 이행은 중요하다. 하지만 이러한 지원이 경영 효율성까지 해치는 방향으로 흘러가서는 안 된다. 지속 가능한 지원을 위해 사회적 책임과 경영 효율성의 균형을 맞춰야 한다. 은행에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이 두 가지 목표가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정책적 지원과 합리적인 규제가 우선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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