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보수라는 말을 어릴 때부터 그것을 늘 아름답게 듣고 보며 자랐다. 지금도 대관령 동쪽 아래에 있는 내 고향 강릉 위촌리에 가면 아직까지 450년 된 대동계가 있다. 어느 효자의 효행이나 바른 실천처럼 마을의 본보기가 될 좋은 일은 서로 권하고(덕업상권), 싸움이나 도둑질처럼 못된 짓을 하면 서로 규제하고(과실상규), 마을 사람들끼리는 서로 예의 있게 대하고(예속상교), 마을에 장례나 물난리 같은 큰일이 있을 때는 서로 돕는다(환난상휼).
이것이 윤리 교과서나 역사 교과서에 나오는 향약의 4대 강목인데, 마을의 이런 강령을 따르고 실천하는 대동계가 나라 전체적으로도 유일하게 이어져 오고 있다. 향약의 구심점으로 또 유일하게 마을 촌장제를 유지하고 있는 마을이다. 어릴 때는 이런 전통과 풍습이 우리나라 마을마다 있는 줄 알았는데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모두 사라지고 오직 우리 마을에만 명맥을 유지한다고 했다. 그것이 또 자랑스럽고, 그런 마을에서 태어난 것이 작가로서는 특히 남이 누리지 못하는 복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어릴 때 기억으로 초등학교 3학년 겨울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이미 그때 삼일장이나 오일장이 일반화되었지만, 장례를 주관하는 할아버지가 유가의 전통에 따라 그달의 마지막 날(그믐날)을 넘겨 다음 달에 장례를 치르게 했다. 그러다 보니 그야말로 기록적으로 33일장을 치르는 걸 보게 되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날이 음력 12월 3일인데, 12월 그믐을 넘긴 다음 달 초하루가 바로 새해 첫날인 설날이어서 이날도 미루고 장례를 치르다 보니 33일장이 된 것이다.
아버지는 부모를 떠나보낸 죄인으로 하늘의 해를 쳐다볼 수 없어 외출을 삼갔다. 꼭 나갈 일이 있을 때는 상제가 밖에 나갈 때에 쓰는 삿갓 모양의(김삿갓이 쓰고 다닌) 방갓을 쓰고 죽장을 짚고 나갔다. 아직 농경사회의 그늘이 짙던 1965년의 모습이다. 이 시절이 바르고 그립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모습이 추억처럼 아련하다. 예절도 법도도 시대 따라 변한다. 15년 후 옛 법식과 법도를 금과옥조처럼 지키고 따르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삼일장으로 모든 절차를 끝냈다. 그래서 예전보다 모자람이 있거나 허술함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예절과 법도는 시대 따라 변해도 우리 마음 안에 바르고 반듯하게 지켜오면 되는 것이다.
보름 전에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형제들 모두 모여 엄숙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가 누워계시는 선영으로 모셨다.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소년 소녀들이었던 손자와 손녀들이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된 모습으로 어머니의 장례를 치렀다. 예전에는 어떻게 33일장이나 치를 수 있었던 것인지 시대 따라 변하고 흘러가는 장례 풍습에 대한 얘기도 나누고 간소화된 절차에 대한 얘기도 나누었다.
그렇게 짧아지고 간소화된 절차 속에서도 향약이 있는 마을 풍습과 전통은 또 그대로여서 마을 어른들과 대소가의 친척들이 장지에 와서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는 것도 특별하게 보였다. 그런 모습 속에 이런 풍습과 절차는 또 언제까지 이어지고 달라질까, 한 시대가 나의 세월 속에 흘러가는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