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창] 멀어져 가는 것들

입력 2025-02-03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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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택 연필뮤지엄 관장

아사다 지로의 소설을 각색한 일본 영화 ‘철도원(鐵道員)’은 기찻길처럼 멀어져 가고, 떠나보내야 하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다. 평행으로 달리는 레일처럼, 다가갈 수도, 완전히 멀어질 수도 없이 오직 앞으로만 가야 하는 숙명을 이야기한다.

평생 철도원으로 일한 오토마쓰는 폐광이 된 시골 마을의 막다른 기차역에서, 그곳에 도착하거나 떠나는 기차들을 맞이하고 보내는 일을 한다. “끊임없이 이어진 레일처럼, 하루도 빠짐없이 달리는 기차처럼 씩씩하게 살아야 한다”는 신념으로.

철도원의 직분에 충실하다 보니 그는 어린 딸의 죽음도,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도 임종하지 못한 채, 죄의식에 힘겨워하면서도 결코 자신의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이들이 떠나간 날에도 그는 어김없이 근무일지에 ‘異常無(이상무)’라고 적었다.

근대와 전근대적 정서가 교차하는 무대

무뚝뚝하고 경직된 표정, 검은 제복과 모자, 그리고 신호용 붉은 깃발. 그의 모습은 어딘가 군국주의의 잔재를 연상시킨다. 철도원이지만 사무라이와도 같은 느낌이다. 스스로에 대한 엄격한 규율과 한 치의 소홀함도 허락하지 않는 직무수행, 개인적인 욕망을 억누르는 수도자적인 태도는 개인의 삶보다 사회적 안녕과 가치를 우선시하는 일본의 국민성을 잘 반영한다.

주인공인 철도원과 마찬가지로, 오랜 세월 그 마을에서 작은 식당과 잡화점을 운영하는 할머니, 어린 시절 고아가 되었지만 마을 사람들의 보살핌으로 이탈리아 요리사가 된 청년, 3대째 철도원으로 근무하는 주인공의 오랜 친구, 낡은 기찻길과 기차역, 오래된 마을. 지속시키고자 하는 것들에 대한 경외와 안타까움이 영화 전반을 지배한다. 규율과 절도라는 근대적 정신, 느슨함과 낡음이라는 전근대적 정서가 교차한다.

결국 폐선될 철로와 기차역, 곧 은퇴를 앞둔 철도원은 서로의 모습을 반추한다. 더 이상 달릴 수 없는 기차처럼, 그는 자신의 마지막 여정을 준비한다. 환각 속에서 딸과 나눈 대화는 그의 내면에 품고 있던 질문을 드러낸다.

“(기차역과 철로가) 없어지면 어떻게 되나요?” “사라지는 거지. 철로가 생기기 전 허허벌판으로 돌아가서, 철로가 있었던 것도 잊어버리는 거야.” 숙명이다.

위고(Victor-Marie Hugo)는 ‘파리의 노트르담(Notre-Dame de Paris)’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성당의 어느 벽에 새겨진 글씨, ‘ANATKH(그리스어로 숙명)’, 마침내 모든 것은 사라지고, 그 기운만이 노트르담 성당으로 용해된다. “그 말(숙명)을 저 벽에 새겨 놓은 사람은 이미 수백 년 전 세월의 파도 사이로 사라져 버렸고, 그 글씨 역시 성당의 벽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성당 자체도 언젠가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 것”이라고.

지켜야 할 시대의 자존심과 가치에 경의

눈 내리는 플랫폼에 쓰러져 숨을 거둔 철도원, 마침내 그는 자신의 종착역에 도착한다. 남은 것은 회한과 그리움, 멀어져 가는 기억뿐이다. 자신의 신념과 가치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주인공은 자신의 사명을 달성했는지, 아니면 못다 이룬 것인지 우리는 알기 어렵다. 다만 감독은 그의 종착을 보여줌으로써 그가 지키려 했던 자존심과 가치에 경의를 표한다.

친구와 동료가 그의 마지막 여정을 위해 기차를 운전한다. 기적 소리를 울리며….

“디젤기차의 기적소리는 가슴에 스며들어요. 듣고 있으면 괜히 눈물이 나요.”

“기적 소리에 눈물이 난다면, 진짜 철도원이 아니지.” 직무에 충실한 사람은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의미지만, 그의 눈은 이미 젖어 있다. 어디선가 디젤기차의 기적소리가 울린다면 나 역시 눈물이 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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