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상캐스터 고(故) 오요안나 씨의 사망이 여전히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지난해 9월 오 씨는 2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비보는 지난해 12월에서야 뒤늦게 알려졌는데요. 이후 고인이 생전 다른 기상캐스터들로부터 직장 내 괴롭힘을 당했다고 토로해왔다는 지인들의 폭로와 보도가 쏟아지면서 충격을 안겼습니다.
파문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생전 고인을 괴롭혔다는 의혹을 받는 기상캐스터 4명의 실명이 밝혀지는가 하면, 이들의 단체 채팅방 내용도 폭로됐는데요. 이들은 비난을 의식해 개인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댓글 창을 폐쇄, 유튜브 영상을 비공개 전환했죠. 그러나 의혹과 관련해선 별다른 입장을 밝히지 않으면서 대중의 공분을 샀습니다.
파장이 커지면서 고용노동부도 나섰습니다. 고용부는 5일 고인의 직장 내 괴롭힘 의혹과 관련해 예비적 조사에 나섰다고 밝혔는데요. 사실관계와 함께 '근로자성'을 중점적으로 살필 계획입니다.
근로자성, 지난해에도 뜨거웠던 단어입니다. 지난해 가요계 안팎을 뜨겁게 달군 그룹 뉴진스 하니는 기획사 하이브 내 괴롭힘을 주장한 바 있는데요. 현역 아이돌 최초로 국정감사에 출석하면서 세간의 관심을 받았죠.
다만 당시 사건은 본안 판단 없이 행정 종결됐습니다. 직장 내 괴롭힘은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일 경우에만 적용되는데요. 하니를 근로자로 판단하지 않은 데 따른 결과였죠.
올해도 직장 내 괴롭힘이 다시금 조명받은 상황. 그렇다면 '프리랜서'인 기상캐스터는 근로자로 판단될까요? 근로자성 여부는 이번 사태의 쟁점으로 떠오른 모습입니다.
지난달 27일 오 씨의 심정을 담은 글이 한 매체의 보도를 통해 공개되고, 유족이 서울중앙지법에 MBC 기상캐스터 A 씨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한 사실도 알려지면서 고인이 생전 직장 내 괴롭힘에 시달렸다는 의혹이 불거졌습니다.
오 씨의 휴대전화에서는 동료 기상캐스터들로부터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한 정황이 담긴 문서가 발견됐습니다. 오 씨를 괴롭힌 것으로 추정되는 기상캐스터들의 실명, 이들이 오 씨가 없는 카카오톡 단체 채팅방에서 험담한 내용 중 일부도 공개됐는데요. 비판 목소리가 커졌지만, 이들은 본업인 기상 예보는 물론 예능, 라디오 출연 등 활동을 이어가면서 의혹에는 별다른 입장을 내놓지 않았죠. 자신의 SNS에 댓글을 달지 못하게 막아두거나, 유튜브 영상을 비공개 전환하는 대응에 나설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파문은 눈덩이처럼 커졌습니다. 한 시민은 지난달 29일 한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고인의 직장 내 괴롭힘 사건을 경찰과 고용부에 고발했다고 밝혔는데요. 그는 국민신문고에 관련 민원을 접수, 해당 민원이 경찰청과 고용부에 배당됐다는 알림 화면을 캡처해 게시물에 첨부했습니다. 피고발인은 MBC, 고인이 소속돼 있던 부서의 책임자, 직장 내 괴롭힘 가해자로 지목된 동료 기상캐스터 2명 등이었죠.
경찰에 따르면 서울 마포경찰서는 지난달 31일 국민신문고 민원을 접수해 내사를 시작했고요. 서울서부고용노동지청은 MBC에 사건을 자체조사하라는 행정지도를 내렸습니다.
MBC는 지난달 31일 '오요안나 사망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했습니다. 이달 5일 고인의 직장 내 괴롭힘 의혹에 대한 공식 조사를 시작했죠.
고용부는 이와는 별개로 예비적 조사도 진행 중인 상황입니다. MBC의 조사 결과만 기다리는 건 적절하지 않다며 직접 서류 등을 살펴보겠다는 입장인데요. 특히 고용부는 이번 작업에서 기상캐스터들의 근로자성 여부를 검토할 예정입니다.
직장 내 괴롭힘은 근로기준법 근로자일 경우에만 적용됩니다. 만약 기상캐스터가 근로자가 아닌 것으로 판단되면, 직장 내 괴롭힘이라는 사건 자체가 성립하지 않기에 고인이 근로자에 해당하는지를 집중적으로 검토하겠다는 거죠.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으로 불리는 개정 근로기준법은 2019년 7월 시행됐습니다.
법률상 금지되는 직장 내 괴롭힘은 '직장에서의 우월적 지위·관계를 이용해 다른 근로자에게 업무상 적정 범위를 넘어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 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를 말합니다.
근로기준법은 '회사가 직장 내 괴롭힘 발생 사실을 인지한 경우 지체 없이 당사자 등을 대상으로 그 사실 확인을 위해 객관적으로 조사를 실시해야 한다'고도 규정하고 있죠.
다만, 이 같은 조항은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에게만 적용됩니다. 근로자는 '직업의 종류와 관계없이 임금을 목적으로 사업이나 사업장에 근로를 제공하는 사람'으로 규정되는데요. 지난해 그룹 뉴진스 멤버 하니는 하이브 내에서 따돌림을 당했다는 의혹을 제기했지만, 조사를 벌인 서부지청은 "(하니를)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보기 어려워 행정 종결했다"고 밝혔죠.
지난해 9월 하니는 멤버들과 진행한 유튜브 라이브 방송에서 하이브 사옥 복도에서 대기하다가 근처를 지나가는 다른 연예인과 매니저에게 인사했는데, 해당 매니저가 '무시해'라고 말했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한 뉴진스 팬은 "하이브 내 뉴진스 따돌림 의혹은 실체적 진실이 규명돼야 한다"며 국민신문고를 통해 고용부에 민원을 제기했죠.
사건을 조사한 서부지청은 이 민원에 대해 "팜하니(하니의 본명)가 체결한 매니지먼트 계약의 내용과 성질상 사용·종속 관계에서 임금을 목적으로 근로를 제공하는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에 해당한다 보기 어렵다"면서 "서로 대등한 계약 당사자의 지위에서 각자의 계약상 의무를 이행하는 관계에 불과해 사측의 지휘·감독이 있었다고 보기 어려운 점"을 이유로 꼽았습니다.
이어 "일반 직원에게 적용되는 회사 취업규칙 등 사내 규범, 제도나 시스템이 적용되지 않은 점", "일정한 근무 시간이나 근무 장소가 정해져 있지 않으며 출퇴근 시간을 정할 수가 없는 점", "연예 활동에 필요한 비용 등을 회사와 팜하니가 공동으로 부담한 점" 등도 이유로 제시했는데요.
또 "지급된 금액이 수익 배분의 성격으로 근로 자체의 대상적 성격이라 보기 어려운 점", "세금을 각자 부담하고 근로소득세가 아닌 사업소득세를 납부하는 점", "연예활동을 통한 이윤 창출과 손실의 초래 등 위험을 스스로 안고 있다고 볼 수 있는 점"도 지적했죠.
판례도 제시했습니다. 대법원은 2019년 9월 연예인 전속계약의 성질을 민법상 위임계약 또는 위임과 비슷한 무명계약에 해당한다고 판시한 바 있는데요. 서부지청은 이를 언급하며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에 해당한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강조했죠.
법원뿐 아니라 정부도 연예인을 근로자와는 거리가 멀다고 판단한 바 있습니다. 고용부는 2010년 연예인을 근로자가 아닌 전속계약을 맺고 활동하는 '예외대상자'라고 판단했죠.
오 씨 사건의 경우 그는 물론, 괴롭힘 행위자로 지목된 다른 기상캐스터들이 모두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여야만 '직장 내 괴롭힘'이 성립합니다.
오 씨는 2021년 프리랜서 기상캐스터로 MBC에 입사했는데요. 프리랜서는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볼 수 있을지 여부가 불투명하다는 우려가 나옵니다. 프리랜서는 특정 소속 없이 계약에 따라 자유롭게 일하는 노동자를 일컫는 말로 통용되고 있는데요. 근로자가 회사의 지시·감독 아래에서 일한다면 프리랜서는 업무 수행의 자유가 있다고 할 수 있죠.
사측과 대등한 입장에서 계약을 맺고 교류하는 '윈윈'(win-win) 관계라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프리랜서를 비롯해 계약직, 파견직 등 불안정 노동자 문제는 방송가의 오랜 문제로 지적받아왔습니다. 한 개의 방송 프로그램은 통상 수십 명의 프리랜서 직원들로 만들어지는데요. 방송 작가부터 조연출(AD), 촬영감독, 디자이너, 편집감독 등 다수의 방송 종사자들은 비정규직 노동자입니다.
이승윤 중앙대학교 사회복지학부 교수는 5일 cpbc라디오 '김준일의 뉴스공감'과의 인터뷰에서 "프리랜서라고 하면 상당히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이미지가 있지만, 사실 현장에서 실질적으로 일을 수행할 때는 어떤 고정된 프로그램을 해야 한다거나 근무 시간이 있다든가 장소가 정해져 있다든가 한 방송사에서만 일한다든가, '순수 자영업자'와는 동떨어져 있다"며 방송가의 '프리랜서 외부화'를 꼬집었습니다. 사실상 회사의 지시와 감독을 받으면서도, 근로자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노동자를 위해 법률상 마련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도 사용할 수 없다는 거죠.
오 씨의 근로자성 판단에 변수는 있습니다. '사용종속관계'가 노무를 제공한 자와 사용자 사이에 유지된다면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인정될 수 있는데요. 고인에 대한 MBC 측의 업무 지휘·감독이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면 근로자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사용종속관계는 △사용자의 업무 지시 여부 △사내 규정 적용 여부 △사용자의 지휘·감독 여부 △근무시간 및 장소 지정 여부 △작업 도구 제공 여부 △보수 지급 방식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판단합니다.
또 최근에는 방송업계 프리랜서의 근로자성을 인정한 법원·고용부 결정이 잇달아 나오기도 했습니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대법원은 일방적 계약 해지 통보를 받은 프리랜서 아나운서 B 씨가 KBS를 상대로 낸 민사 소송에서 B 씨의 손을 들어준 원심판결을 확정했습니다. 당시 대법원은 △B 씨가 방송국의 지휘·감독에 따라 정규직 아나운서와 동일한 업무를 수행한 점 △다른 방송에 출연하지 않고 회사에 전속된 점 △근무 일정이나 장소를 회사가 정한 점 △방송 출연 건별로 급여를 받은 점 △휴가 일정을 사측에 보고·관리받는 시스템이었던 점 등을 근거로 B 씨의 근로자성을 인정했죠.
2021년에는 고용부가 KBS·MBC·SBS와 각각 프리랜서 계약을 체결한 152명의 방송작가의 근로자성을 인정했습니다. △작가들이 위탁계약에 따른 원고 집필 외에 사측 요청으로 다른 업무도 함께 수행한 점 △방송사로부터 상당한 지휘·감독을 받은 점 등을 고려해 근로자로 볼 수 있다고 판단했는데요. 다만 일부 작가들에 대해서는 원고 집필에 관한 상당한 재량이 있고, 일방적 지휘·감독이 아닌 협업 관계에서 독립적으로 업무를 수행했으며, 프로그램 제작에 대한 상당한 책임 및 권한을 갖고 있어 사용존속관계를 단정 짓기 어렵다고 봤죠.
유사한 화두가 다시금 조명받은 만큼, 궁극적으론 제도적인 보완책이 마련돼야 한다는 주장이 이어지는데요. 고인의 사망과 관련한 면밀한 사실관계 요구 목소리는 이미 절정에 달한 상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