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 국내 반도체 업계가 여러 대내외적 불확실성 위기에 직면했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자국 우선주의 기조가 심해지고 있으며, 그간 후발주자로만 여겼던 중국의 성장세도 가팔라지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여전히 한국 반도체 업계는 ‘주 52시간 근무제’ 등 여러 장애물에 가로막혀 날개가 꺾인 상태다.
이규복 한국전자기술연구원 석좌연구위원은 올해가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가 될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인공지능(AI) 기술이 점차 다양해지고, 적용 분야도 세분화하는 현시점에 반도체 패권 경쟁에서 한번 주도권을 놓치게 되면 영원히 뒤처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무엇보다 올해 반도체 시장에서 가장 큰 변수로 ‘중국 기업의 반도체 기술력 굴기’를 꼽았다.
이 연구위원은 최근 경기 성남시 한국전자기술연구원에서 진행된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중국의 반도체 기술력이 급부상하고 있다는 게 올해 가장 큰 변수”라며 “우리나라가 그간 잘했던 분야가 메모리, 공정, 양산 등의 분야였는데 최근에는 중국이 거의 다 따라잡았다”고 설명했다.
이어 “일반 가전 및 전자제품용 반도체 쪽은 중국이 앞선 지 오래고, 최근에는 AI 프로세서 쪽도 화웨이를 중심으로 기술력이 상당히 올라와 있다. 한국보다 적어도 1년 정도는 앞서 있는 것으로 보인다”면서 “미국이 엔비디아의 고급 반도체를 팔지 못하게 하는 상황인데도 여러 제품을 내놓는 것으로 봐서는 확실히 우려스러운 상황이다. 현재로써는 중국이 미국 다음으로 반도체 강국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경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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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최근 한국의 반도체 기술 수준이 2년 새 대부분 중국에 추월당했다는 전문가 조사가 나와 업계가 발칵 뒤집혔다.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이 발간한 ‘3대 게임체인저 분야 기술수준 심층분석’ 브리프에 따르면 △고집적·저항기반 메모리 기술 △고성능·저전력 인공지능(AI) 반도체기술 △전력반도체 기술 △차세대 고성능 센싱기술 등 대부분의 반도체 분야 기술 기초 역량에서 중국이 한국보다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연구위원은 “중국은 현재 반도체에 120조 원 규모의 대규모 투자를 진행하는 반면, 우리나라는 연간 연구개발비가 29조~30조 원 수준에 그친다. 중국은 연구 인력 마저 많다”며 “반도체는 국가 패권 경쟁에서 중요한 무기가 됐기 때문에 기술 개발에 매진할 수 있는 환경을 조속히 만들어야 한다”고 제언했다.
우선적으로 그는 국회에서 8개월째 공회전 중인 반도체 특별법상 주 52시간 근로제 예외 적용에 대한 합의가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이 연구위원은 “반도체 기술 연구개발은 주 52시간 근로제를 적용받는 상황에서는 온전히 몰두하기 어렵다”며 “반도체는 연속적인 연구가 필요한 분야인 만큼 획일적인 근무제보다는 유연 근무제를 적용해 흐름이 끊어지지 않는 환경을 만들어 줘야 한다”고 피력했다.
갈수록 심해지고 있는 반도체 인력난에 관해서는 “현재 정부의 대책은 단순히 대학교 내 반도체 학과를 만들고, 교수한테 맡겨 알아서 육성하라는 수준밖에 안 된다”면서 “반도체 산업은 소재, 공정, 설계, 테스트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저숙련 노동자부터 고숙련 노동자까지 다양한 인력이 필요하다. 각 분야와 단계별 맞춤 교육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특히 최첨단 AI 반도체 설계 등 고급 인력들은 급여에 대한 상대적 박탈감 등으로 미국 기업으로 옮기는 사례가 많다”며 “급여를 올리기 어렵다면, 정부가 세제 혜택을 줘 한국에서 일할 수 있도록 지속적인 동기부여를 만들어줘야 한다”고 조언했다.

반도체에 대한 미국의 관세 부과 계획도 점차 현실화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18일(현지시간) 최소 25% 이상에 달하는 반도체 관세를 단계적으로 부과하겠다고 공언했다. 관세 공격을 피하고 싶으면, 직접 미국 현지에 공장을 지어 생산하라는 의미다. 이 연구위원은 미국과의 협력 제스처는 중요하지만, 그 가운데 첨단 공정만큼은 국내에서 담당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현재 국내에서 생산하고 있는 AI향 최고 사양 반도체들도 미국으로 들어갈 때 가격이 높아지게 된다”며 “반사적으로 현지에서 자국 기업인 마이크론의 제품 수요가 늘어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이어 “반도체는 다양한 곳에서 필수적으로 쓰이는 만큼 관세가 더해지면 여러 제품군에서 가격이 오를 것”이라며 “그렇게 되면 미국에도 부담이 된다. 관세 옥죄기가 장기적으로 진행될 것 같지는 않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미국 정책에 끌려가는 게 아니라 협력하는 제스처가 중요하다”면서도 “핵심 반도체, AI 반도체 등 첨단 기술 공정은 무역 안보 문제와도 직결되기 때문에 국내에서 담당하고, 그 외의 제품들에 대해서는 현지에서 생산하는 양면 전략이 병행돼야 한다”고 힘줘 말했다.
관세 부과 외에도 최근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바이든 행정부 당시 맺었던 보조금 지급 계약도 재검토할 수 있다고 시사했다.
이 연구위원은 “기업들이 미국 내에 좀 더 많은 공장을 짓고 인력을 좀 더 투입해서 여기서 생산을 많이 하라는 이야기”라며 “현지에서 라인을 짓고 생산을 하면서 그 이익을 가지고 다시 재투자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협상을 시작해야 한다”고 했다.

이 연구위원은 지난해부터 이어진 반도체 시장 침체 상황이 트럼프 리스크와 겹쳐 상반기까지는 계속 이어질 것으로 내다봤다.
그는 “트럼프 정부의 기조가 무역을 옥죄는 방향으로 가고 있어서 상반기까지는 여러 어려움이 있을 것 같다”며 “전반적인 반도체 시장 경기는 3~4분기는 돼야 차츰 안정화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연구위원은 미국 엔비디아가 주도하는 AI 반도체 시장 트렌드는 올해도 이어지지만, 이와 동시에 탈(脫) 엔비디아 움직임도 가속화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여전히 데이터센터 수요가 견조하기 때문에 HBM과 어우러지는 엔비디아의 시장 주도권은 꾸준히 갈 것 같다”면서도 “탈 엔비디아를 추구하는 미국 IT 기업은 도메인별 특화된 영역에 맞는 자체 AI 칩셋 솔루션도 활발하게 선보일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새롭게 개화할 시장으로는 ‘위성’과 ‘국방’ 산업을 꼽았다. 이 연구위원은 “인공위성이나 첨단 무기 쪽으로 넘어가게 되면 여러 센서가 복합적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고성능 반도체 탑재도 늘어나게 된다”며 “아직 위성과 국방 분야는 수량 자체가 그렇게 많지는 않지만, 금액적인 면에서 상당히 크기 때문에 향후 주목받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편 이 연구위원은 30년 이상 반도체 업계에 몸담아 온 베테랑 전문가다. 한국전자기술연구원에서 융합통신부품연구센터장, 부품소재연구본부장, 정보통신미디어연구본부장을 두루 거쳤다. 2019년부터 지난해까지 5년간 부원장으로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