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가잡고 흑자재정 등 경제안정
‘밸류업 시늉’ 韓 과감한 혁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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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지구 정반대 편에 있는 아르헨티나의 대표 주가지수 메르발(MERVAL)은 지난해 무려 172.52% 상승했다. 채무불이행 선언을 밥 먹듯이 하는 나라, 지난해 경제성장률이 -3.8%에 50%가 넘는 상대적 빈곤율 등 경제지표를 감안해보면 경이로운 신장세다. 주가가 날아오른 것은 취임 1년을 넘긴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의 개혁정책이 실현될 것이라는 기대가 작용했기 때문이다. 선거유세 때 가죽 재킷 차림에 전기톱을 휘둘렀던 퍼포먼스는 허세가 아니었다.
그는 취임과 함께 기존 18개였던 정부부처를 9개로 줄였다. 문화·교육·보건·노동 및 사회개발부를 인적자본부 하나로 통합한 것이 대표적이다. 공무원은 5만 명 넘게 해고했다. 정부 관용차와 운전기사도 절반으로 줄였다. 아르헨티나의 공무원 비중은 2023년 2월 기준 전체 인구의 7.4%에 달했었다. 또 페소화를 54% 평가절하하는 강수를 뒀다. 암시장 달러 환율과 정부 공식 환율을 맞추고 수출경쟁력을 높이겠다는 구상이었다.
개혁의 일차적 초점은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을 잡는 것에 있었다. 그러자 월평균 13%에 달하던 물가상승률이 지난해 11월에는 2.4%로 떨어졌다. 2020년 7월 이후 처음이었다. 또 지난해 1분기에 16년 만에 처음으로 재정흑자를 달성한 뒤 계속 흑자기조를 유지했다.
그는 스스로를 무정부 자본주의자(Anarcho-capitalist)라고 불렀다. 이는 국가 없는 사회를 지향하는 극단적 경제철학으로 “국가에 대한 나의 경멸은 끝이 없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또 “국가는 세금이라는 강제적 소득원으로 유지되는 폭력적인 범죄조직”이라고도 했다. 그의 반려견 4마리의 이름은 밀턴, 머리, 로버트, 루카스인데 밀턴 프리드먼과 머리 로스바드, 로버트 루카스 등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그만큼 이론적 토대도 탄탄하다.
그럼에도 밀레이 대통령은 무정부 자본주의는 이론적인 접근일 뿐이라며 현실에서는 기성정치를 배제하지 않고 협치를 실천했다. 여소야대 상황에서 의회의 지지를 얻기 위해 페론주의를 제외한 중도와 우파 정치인들을 장관으로 기용했다. 중앙은행 폐지 같은 과격한 공약도 접었다. 정부를 맡았으니 정부의 규칙과 역할을 존중한다는 뜻이다.
그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의외로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다. 그녀는 아르헨티나 국민들에겐 원수와도 같은 존재다. 1982년 포클랜드 전쟁에서 아르헨티나에 패배의 수치를 안겨줬기 때문이다. 밀레이는 대선 기간에 대처를 치켜세웠다가 논란이 일자 “대처의 위대함을 무시하는 것은 프랑스의 음바페가 월드컵 결승전에서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해트트릭을 기록했다고 그의 탁월함을 무시하는 것과 같다”고 맞받아치기도 했다.
경제정책의 최우선 과제인 물가안정을 달성한 밀레이는 점차 성장정책으로 전환하고 있다. 임업, 관광, 에너지, 철강 등의 산업에 2억 달러 이상 투자한 기업들에 법인세율을 10%포인트 인하해 주는 등 투자촉진을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아르헨티나 경제가 올해 5% 이상 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54.8%까지 올라갔던 빈곤율도 경제가 성장하면서 지난해 하반기에는 36.8%로 호전됐을 것이라는 추계도 나왔다. 자신감을 얻은 밀레이는 취임 1주년 TV 연설에서 그간 통제된 달러 거래를 허용하고 현행 세금의 90%를 없애는 세제개혁을 내놓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세계 경제, 외교의 변방인 아르헨티나는 미국이 밀레이 개혁을 모범사례로 평가하면서 큰 주목을 받고 있다. 트럼프 2기에서 신설된 정부효율부(DOGE)의 수장으로 지명된 일론 머스크는 “아르헨티나가 인상적인 진전을 이뤄냈다”라고 후한 점수를 줬다. 그런가 하면 지난 20일 메릴랜드에서 열린 보수정치행동회의(CPAC)에서 밀레이가 건네준 전기톱을 휘두르기도 했다. 트럼프가 당선 후 제일 먼저 만난 외국 정상이 밀레이다. “남미의 트럼프”라는 별명이 거저 생겨난 것은 아니었다. 트럼프의 취임 후 전화통화도 해내지 못한 우리가 보면 밀레이의 개혁은 속도와 성과에서 본받을 만하다.
물론 한국과 아르헨티나를 단순 비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밀레이 개혁이 성공했다고 결론 내기도 아직은 이르다. 그럼에도 국제사회는 아르헨티나의 국가 밸류업이 가속될 것이라는 점은 인정한다. 우리도 국가 밸류업이 절실한데 아르헨티나에서 전기톱이라도 수입해야 되는 것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