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억의 유러피언 드림] 55. ‘얄타 2.0’에 대응하는 유럽

입력 2025-03-05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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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 국방군사학과 교수·국제정치학

미국 없는 유럽 안보 ‘발등의 불’
국방비 증액…단일채권 발행추진

독일과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주요국의 지도자들은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유럽정책에 맞서 다시 ‘얄타’를 곱씹어 본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전쟁은 유럽의 문제라며 휴전 후 안전보장도 유럽이 떠맡으라 요구하는데 정작 협상에는 우크라이나나 유럽의 참여를 불허한다. 강대국들이 유럽의 운명을 마음대로 결정한다.

미국은 또 우크라이나에 지원한 금액의 최소 4배가 넘는 5000억 달러, 700조여 원의 돈을 전쟁으로 피폐한 나라의 광물자원 개발 수익으로 챙기려 한다. 지난달 28일 백악관에서 열린 정상회담은 광물자원 제공과 안전보장 연계를 요구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요청을 트럼프가 거부하면서, 양측의 설전이 전 세계에 보도됐다.

현재의 상황이 1945년의 얄타회담과 유사하기에 ‘얄타 2.0’이 거론된다. 80년 전인 1945년 2월 4일부터 일주일간 당시 얄타에서 나치에 대항해 싸우던 미국과 영국, 소련의 지도자들이 만났다. 미영은 소련의 2차대전 참전 대가로 동유럽을 소련의 세력권으로 인정해준다. 1990년 독일이 통일되고 소련이 해체되기 전까지 냉전 시기 이런 세력 구도는 그대로 유지됐다.

‘유럽통합 강화’ 인식 커져

새로운 얄타 앞에서 유럽은 분노할 시간조차 없다. 미국이 없는 유럽의 안보를 대비해야 한다. 때마침 독일의 조기 총선에서 중도우파로의 정권 교체가 있었고, 유럽연합(EU)차원에서도 생존 대책이 마련 중이다.

지난달 23일 독일 조기총선에서 예상대로 중도우파인 기민당·기사당이 승리했다. 차기 총리가 될 프리드리히 메르츠 기민당 당수는 승리 수락 연설에서 “유럽은 국제무대에서 독일의 리더십 행사를 기다린다. 조속한 시일 안에 유럽통합을 강화해야 점진적으로 우리는 미국에서 진정으로 독립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트럼프 행정부는 유럽의 운명에 무관심하다”며 우크라이나에 대한 유럽의 평화유지군 파병 등에 대한 공동입장을 마련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지난달 26일 파리를 방문해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유럽 안보를 논의했다.

유럽통합을 주도해온 프랑스와 독일은 신임 수반이 취임하면 첫 해외순방으로 상대국을 선택하는 게 60년 넘게 이어온 관례이다. 그러나 공식 취임 전에 총선에 승리한 독일 야당의 당수가 프랑스 대통령을 방문한 것은 이례적이다. 마크롱이 24일 미국을 방문해 트럼프를 만나고 우크라이나의 안전보장에 미국이 거의 관여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확인한 후다.

마크롱은 트럼프 집권 1기 때부터 유럽의 전략적 자율성을 줄기차게 강조해왔다. 미국에 안보를, 중국에 경제를, 러시아에 에너지를 의존한 유럽의 취약성을 거론하며 국방비 증액과 시장 다변화 등을 말했다.

정권 교체가 된 독일은 당장 국방비 증액을 해결해야 한다. 메르츠 당수는 파리 방문 직전에 사회민주당 및 녹색당 지도부를 만나 2000억 유로, 약 280조여 원의 국방예산 증액을 논의했다. 2022년 2월 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 당시 사민당의 숄츠 총리는 4년간 1000억 유로의 국방비 증액을 발표하고 상반기에 의회의 승인을 받았다. 이 증액으로 독일은 작년에야 나토 회원국들이 약속한 국내총생산(GDP) 대비 2% 국방비 지출을 달성했다. 2021년에 국방비 지출은 겨우 1.3%에 불과했다. 이 증액이 2028년에 종료되기에 시급하게 이후 4년간의 증액이 합의돼야 한다. 유럽 굴지의 방산업체인 독일의 라인메탈(Rheinmetall)은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후 생산라인을 증설했고 레오파르트(Leopard)2 탱크 제작에 주력해왔다. 당장 2028년 이후의 국방비 증액이 안되면 이 탱크의 추가 생산이 쉽지 않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왼쪽부터)과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2일(현지시간) 영국 런던 랭커스터하우스에서 열린 비공식 유럽 정상회의가 끝난 뒤 얘기를 나누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왼쪽부터)과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2일(현지시간) 영국 런던 랭커스터하우스에서 열린 비공식 유럽 정상회의가 끝난 뒤 얘기를 나누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균형재정에서 국방비 예외 검토

국방비 증액이 시급한데 총선 후 급진정당의 약진이 발목을 잡는다. 극우정당인 독일대안당(AfD, 20.8%, +10.4%), 통합좌파당도 선전(8.7%, +3.8%)했다. 기본법(헌법)에 연방정부의 순부채가 GDP의 0.35%를 넘어서는 안된다는 균형재정 조항이 있다. 2개 급진정당 모두 국방비 증액을 위한 균형재정 조항 완화에 반대하는 데다, 이들이 개헌저지선인 3분의 1을 쥐고 있다. 기민·기사당과 사민당의 연립정부 구성 가능성이 높은 가운데 새로 형성될 연정이 이 문제를 시급하게 처리해야 한다.

외교와 안보, 국방정책은 27개 EU 회원국의 거부권 행사가 가능하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후 EU 차원에서 대러시아 공동제재를 부과했고 우크라이나에 대규모 무기와 경제지원도 제공해왔다.

유럽의 안보에서 손을 떼려는 트럼프의 정책으로 EU 차원의 공동대응도 윤곽이 뚜렷해진다. 지난달 중순부터 에마뉘엘 마크롱 주재로 EU 집행위원장 등 EU 기구의 수장들과 독일, 이탈리아, 폴란드 등 회원국과 비회원국인 영국도 참가하는 회담이 두 차례나 열려 대책이 논의됐다. 여기서 국방비를 늘리기 위한 유로화 단일채권 발행안도 진전이 있었다.

EU 공동안보 촉진 ‘트럼프 효과’

2020년 코로나19 발발 때 독일의 메르켈 총리가 제안해 8000억 유로의 지원이 합의됐다. 행정부 역할을 하는 EU 집행위원회는 EU를 대표해 최대 20년이 넘는 장기 유로화 채권을 발행했다. 회원국들이 경제력에 비례해 장기 분할 상환하기에 그리 부담이 크지 않다. 미국이 유럽주둔 미군을 점차 줄이고 나토의 예산 부담도 지금의 3분의 2에서 축소하면 유럽이 이 감소분을 만회해야 한다. 또 유로존 회원국들은 재정적자가 GDP의 3%를 초과할수 없는데 국방비 지출은 예외를 적용하자는 집행위 제안을 회원국들이 검토 중이다.

EU 27개 회원국의 평균 경제성장률은 1% 남짓. 저성장의 늪에 빠진 회원국들이 국방비 증액을 하려면 복지를 대폭 삭감해야 하는데 어렵다. 따라서 코로나19 때처럼 유로화 단일채권을 장기로 발행하는 게 현실적인 안이다. 시간은 걸리겠으나 차차 단일 유로 채권 발행의 윤곽이 드러날 것이다.

또 EU 차원에서도 첨단 무기 공동개발과 공동구매도 추진한다. 이탈리아의 방산업체 레오나르도와 독일의 라인메탈은 5 대 5 지분으로 이탈리아의 신형 탱크를 개발 중이다. 일요일인 2일 긴급 소집된 런던 정상회담에서 영국과 프랑스가 주도하는 우크라이나 휴전을 감시할 지상군과 공군 파견이 논의됐다. 유럽의 다른 나라들도 여기에 합류할 듯하다. 트럼프라는 강력한 외부 채찍이 유럽의 공동안보를 의도치 않게 촉진 중이다.

대구대 교수(국제정치학)

‘하룻밤에 읽는 독일사’ 저자

팟캐스트 ‘안쌤의 유로톡’ 제작·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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