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정원은 이국의 희귀식물이나 값비싼 정원수들, 여기저기서 수집한 바위들로 사치스럽게 꾸민 장소가 아니다. 그저 작약과 모란 같은 꽃들이 피고 꿀벌들이 날개를 닝닝대는 곳, 날 밝으면 세상을 밝힌 햇빛이 비쳐드는 곳, 보리수, 앵두나무, 버드나무, 산딸나무, 남천나무, 회양목, 회화나무, 살구나무가 어우러진 곳, 교목 아래 튤립, 원추리, 비비추, 제비꽃, 수선화, 맥문동 따위가 무리지어 자라는 땅이다. 수목이 풍성하게 어우러진 정원 한 구석에 개구리밥이 수면에 뜨고, 노란붓꽃과 수련이 꽃을 피우는 연못이 숨어 있고, 거위들이 뒤뚱거리며 돌아다닌다면 더 좋았을 테다. 담쟁이덩굴이 벽을 타고 오르며, 참새, 동박새, 붉은머리오목눈이, 곤줄박이, 물까마귀들이 찾아와 쉬는 정원이 있었더라면 사는 게 그토록 버겁지는 않았을 테다.
내게 정원이란 무엇이었을까? 보통 사람들이 꿈꾸는 정원은 비밀의 화원, 식물들의 보금자리, 잃어버린 낙원이다. 정원의 기본은 땅과 그 위에 자라는 초목들이다. 정원의 식물이란 “시간과 공간의 여행자”(올리비아 랭)이다. 정원은 더 많은 세상과 아름다움, 더 좋은 기회들을 준다. 정원이 제 몸에 갇힌 자아를 해방하며 더 많은 자유를 준다는 점에서 그것의 부재는 기쁨의 결락과 함께 불행의 원인이었을 테다. 난잡한 세상에서 도피할 수 있는 땅, 은둔과 휴식과 치유의 땅이 정원이라면 그것은 지옥 저편의 낙원일 테다. 정원은 꽃이 뿜어내는 색채들과 방향들로 “감각이 열리고, 생각이 자유롭게 흘러”가는 곳이다.
올리비아 랭의 ‘정원의 기쁨과 슬픔’을 읽으며 정원을 갖지 못한 자의 불행을 조금은 누그러뜨릴 수 있었다. 정원이 있다면 충치를 아말감으로 덧씌우고, 메마른 노동의 피로를 견디며 사는 자의 사소한 불행 두어 개쯤은 이겨냈을 테다. “우리는 정원에서 스스로를 잃을 수 있어야 한다. 세상과 거의 차단된 느낌을 받아야 한다.” 올리비아 랭의 구절에 무릎을 친 것은 내 불행이 정원의 부재와 더불어 나를 놓아본 적이 없는 탓이라는 깨침 때문이었다. 우리는 세상과 차단된 채로 자신을 잃는 고요한 찰나를 겪으며 정화되어야 하지만 나는 그러지를 못했다. 세상의 압력과 소요로 인해 내면은 늘 시끄럽고, 나는 세상의 근심과 걱정을 끌어안은 채 전전긍긍했다.
왜 팬데믹 기간 전 세계에서 정원 가꾸기 붐이 일어났을까? 그 시기에 정원용품들이 불티나게 팔리고, 식물의 씨앗과 모종의 판매량이 늘었던 것은 주목할 만하다. 사람들은 삶이 삭막하고 피로해지면 땅과 식물을 떠올린다. 정원은 실낙원에서 비롯한 절망을 이겨내려는 인류의 염원을 담아낸다. 정원은 살과 피가 없는 식물들이 부르는 노랫소리가 울리는 곳, 색채의 향연이 감각의 화사함을 만드는 곳, 육식동물에겐 마음의 안식을 위한 피난처다. 우리에게 정원이 있었다면 봄마다 씨앗과 구근들이 땅거죽을 밀어내고 내미는 새싹들, 만개한 꽃들, 정원이 불러 모은 벌과 나비와 새에게서 기쁨을 얻었을 테다. 그리고 기다림과 희망에 대해서 더 많이 배우고, 정원이 품은 풍부한 빛과 향기와 색채들로 지친 내 영혼은 큰 위로를 받았을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