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업·반시장 등 위험요소 수두룩
성장 아닌 권력집착 정상배 경계를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엉터리 키 광고·판매를 단속했다는 보도자료를 지난주 냈다. “한 달에 1㎝ 컸어요” 식의 ‘키 크는 약’ 체험기도 들어 있다. 저급한 상술이 왜 횡행할까. 시장이 멍청해서가 아니다. 키가 중요해서다. ‘금쪽같은 내 새끼’를 돌보는 학부모에겐 더욱 그렇다. 캐나다 경제사학자 바츨라프 스밀의 표현을 빌리면 키는 ‘개인 안녕의 많은 측면을 정량화하기에 아주 좋은 대리 지표’다. 키 식품·약품 광고에 학부모가 혹하지 않는다면 그게 외려 이상한 일이다. 그 광고가 왜곡·과장이든 사기든 간에….
국가도 키가 있다. 국내총생산(GDP)이다. 부국과 빈국이 갈린다. 식약처가 키 자료를 낸 날, 한국은행은 국가의 키 자료를 냈다. 1인당 국민총소득(GNI)이다. 국민 생활 수준을 보여주는 GDP 연동 지표다. 한국의 지난해 1인당 GNI는 미화 기준 3만6624달러로 전년보다 1.2% 증가했다. 인구 5000만 명 이상 국가 중 6위다. 우리 앞엔 미국 독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가 있을 뿐이다.
6위 순위는 제법 대견하지만 문제가 없진 않다. 가장 아쉬운 것은 11년째 연속 4만 달러 문턱을 넘지 못했다는 점이다. 우리가 가보지 못한 4만 달러 세상을 밟은 나라는 인구 1000만 명 이상에선 10곳뿐이다. 3만 달러에서 평균 4.9년 걸렸다. 미국은 7년 만에 2004년 터치다운을 했고 2023년엔 인구 대국 중 처음으로 8만 달러 시대를 열었다. 영국은 금융·서비스 혁신으로 2002년 2만 달러 선을 돌파한 지 2년 만에 4만 달러 국가가 됐다.
일본은 미·영과 궤적이 다르다. 1992년 3만 달러, 1994년 4만 달러 허들을 넘었다. 파죽지세였다. 그 후가 문제다. 국가 경제가 어려워지는데도 구조조정을 미루고 또 미뤘다. 그렇게 ‘잃어버린 10년’을 30년으로 늘렸다. 자충수였다. 1인당 GNI는 3만 달러대로 쪼그라들었다. 공든 탑이 무너지는 것은 생각보다 쉽다.
국가의 키는 인간과 달리 얼마든지 다시 작아진다. 일본만이 아니다. 20세기 초 10대 부국이던 아르헨티나가 빚더미 국가로 전락할지 누가 내다봤겠나. 천혜의 자원 부국을 거덜 낸 포퓰리즘 열병은 아르헨티나만의 풍토병이 아니다. ‘잃어버린 30년’도 일본만의 질환일 리 없다.
11년째 쳇바퀴를 돌리는 한국 경제는 괜찮나. 우리 주력산업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거의 똑같다. 고인 물이다. 고령화·저출산, 생산성 저하 등 위험 요소도 수두룩하다. 걱정이다. 이에 무심한 정치권이 너무 이상해 보일 지경이다.
우리네 학부모에겐 국가의 키가 아니라 아이 키가 중요할 것이다.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아이를 위해서라도 국가의 키에 눈길을 둬야 한다. 적어도 엉터리 약품·식품보다는 GDP 연동 지표의 키 성장 효과가 훨씬 더 믿을 만하니까.
앞서 인용한 스밀에 따르면 범세계적 경제성장과 더불어 모든 것이 커지는 추세다. TV 화면은 대각선이 1950년대 평균 30㎝에서 2021년 125㎝로 커졌다. 화면 면적이 15배 이상 커졌다는 뜻이다. 인간 키도 커졌다. 약 1000년 동안의 장기 추세를 추적한 유럽 연구를 종합하면 18세기까진 큰 변화가 없다. 얘기가 달라진 것은 1870년 이후다. 산업혁명 혜택이 고루 확산하는 시기다. 유럽 남성은 1980년대까지 평균 11㎝ 커졌다.
1896~1996년 200개국에서 태어난 약 2000만 명의 1500개 집단을 분석한 연구도 있다. 100년 사이에 여성은 8.3㎝, 남성은 8.8㎝ 커졌다. 가장 획기적으로 커진 집단은 한국 여성이다. 평균 20.2㎝ 커졌다. 나라가 잘살게 되면 키도 비례적으로 커지는 것이다. 바로 우리가 좋은 본보기다.
키의 핵심 변수는 ‘키 크는 약’ 따위가 아니다. 밥을 잘 먹고, 잘 자면 된다. 각 가정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국가적으로 큰 골격을 잡아주는 것은 GDP 연동 지표다. 학부모가 주목할 것은 엉터리 광고가 아니다. 국가의 키다. 나라가 망가지든 말든 권력만 잡으면 그만이라는 저급한 정상배 무리를 경계·견제해야 하는 것은 역사적 책무만이 아니다. 학부모로서의 중차대한 책무이기도 하다.
그들은 우리네 아이 키엔 관심이 없다. 국가의 키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다면 왜 반기업·반시장 폭주를 저토록 심하게 하겠나. 관심사가 다르다. “한 달에 1㎝ 컸어요” 무리보다 더 위험한 ‘키의 공적’인지도 모른다. trala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