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현로] 블레어 제3의 길 vs 이재명 중도보수

입력 2025-03-11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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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설 한국좋은일자리연구소장ㆍ일자리연대 집행위원장

英노동당 강령바꿔 실용노선 실현
李, 말로만 성장우선 ‘반시장’ 여전
노란봉투법·주52시간 갇혀선 한계

1994년 영국 노동당 당권을 잡은 토니 블레어는 진보와 보수를 아우르는 실용주의 중도노선인 ‘제3의 길’을 제창했다. 그는 3년 뒤 치러진 총선에서 분배·복지 중심의 기존 노동당 정책 노선에서 자유시장경제를 혼합한 중도 노선으로의 전환을 약속해 총리에 당선됐다. 친노동 ,반시장 이념을 고집하던 노동당이 친시장, 친기업쪽으로 노선을 수정하겠다는 다짐은 국민들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갔고 결국 18년간의 야당 신세를 면했다.

제3의 길은 선언적 의미로 끝나지 않았다. 블레어는 전당대회에서 ‘생산, 분배 및 교환수단의 공동소유’를 규정하던 당헌 제4조를 폐지하는 대신에 ‘소수가 아닌 다수의 손에 권력과 부, 그리고 기회가 주어지는 공동체건설을 지향한다’는 수정안을 삽입했다. 글로벌 경제전쟁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효율성과 생산성을 높일수 있는 실용주의 정책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데 따른 것이다.

블레어는 집권 후에도 노동권력을 무력화시킨 보수당 마거릿 대처의 개혁정책을 별다른 손질없이 그대로 수용해 경제성장의 발판으로 삼았다. 이 때문에 그는 좌파 진영으로부터 ‘바지 입은 대처’,‘토니 블러(blur·흐릿한 사람)’ 등의 비아냥을 듣기도 했지만 이를 발판으로 영국 경제는 다시 활기를 띠었다. 블레어 집권 10년 동안 영국의 일자리는 70만 개 창출됐고 취업률은 75%대로 올랐다. 또 7.5%까지 치솟던 실업률은 4~5%대로 감소했고 경제성장률도 연평균 2~3%대를 유지할 정도로 양호했다.

제3의 길은 1990년대 후반 노동권력에 휘들리며 국민들로부터 외면받던 유럽의 ‘낡은 좌파’ 정치권에 돌풍을 일으키며 구세주 역할을 했다. 프랑스 사회당의 리오넬 조스팽은 제3의 길을 내세워 1997년 총리가 돼 우파의 자크 시라크 대통령과 동거정부를 구성했고, 독일 사민당의 게르하르트 슈뢰더도 1998년 총선에서 ‘새로운 중도노선’을 외치며 승리, 집권에 성공했다. 당시 16년 넘게 장기 집권한 우파 기민당의 헬무트 콜 총리와의 싸움이었기에 슈뢰더로선 더욱 값진 승리였다.

요즘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느닷없이 내놓은 중도보수로의 노선 전환을 놓고 말들이 많다. 겉으로 보기에는 블레어의 제3의 길을 흉내낸 것처럼 보이는데 내용을 보면 전혀 진정성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일자리는 기업이 만들고 기업의 성장발전이 곧 국가경제 발전이다” 등 정치지도자로서 할 만한 친시장적 말들을 쏟아냈다. “이념과 진영이 밥먹여 주나. 검든 희든 쥐만 잘 잡으면 좋은 고양이다”라며 등소평이 했던 흑묘백묘론까지 동원했다. 기업이나 우파 진영에선 이재명 대표가 친노동,반시장의 늪에서 벗어나 이제 현실적인 실용주의 노선으로 전환하는 것 아니냐는 기대감을 갖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약속은 시간이 갈수록 실망으로 바뀌고 있다. 자꾸 말이 오락가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억대 고연봉 반도체 연구개발 연구원에 대해 “주 52시간 근로제를 허용하는 반도체특별법 예외적용 필요성에 공감한다”고 밝혔다가 양대 노총이 반대하자 “좀더 검토를 하겠다”고 한발 물러났다. 아예 ‘주 40시간제’ 도입을 꺼내들며 마치 노동자의 삶의 질을 챙기는듯한 뉘앙스를 풍기기도 했다. 밤새 일해도 경쟁력 확보가 쉽지 않은 스타트업이나 후발 신생기업들에게 경직된 주52시간제를 강요하는 것은 성장기회를 박탈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말로만 성장과 일자리다. 불법 파업을 면책하는 노란봉투법 강행, 과거 화물연대 파업을 불렀던 안전운임제 부활 시도, 경제계가 반대하는 상법개정안 강행 등 민주당의 행태를 보면 중도보수로의 전환이 아니라 작심하고 친노동, 반시장 정책을 펼쳐 우리 경제를 망치겠다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를 갖게 한다.

지금껏 반시장정책을 보따리로 풀어 놓은 정당이 분배보다 성장을 우선한다는 보수적 가치를 내밀었으면 그에 걸맞은 액션을 취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지만 민주당은 구체적 행동은 없다. 민주당은 작년 가을부터 기본사회를 당 강령에다 집어넣고 사회주의식 노선을 채택했지만 당강령을 바꾸겠다는 말은 한마디도 없다. 말로만 중도보수, 실용주의, 성장 운운하며 국민을 기만하고 있다. 이 대표가 중도보수 노선으로의 전환에 대한 진정성을 보이려면 민주당의 당헌,당규에 자유시장경제 이념들을 반영하고 실제로 이에 걸맞은 정책들을 제시해야 한다. 그래야 많은 국민이 이제 민주당도 유럽의 좌파 사민당, 노동당처럼 자유시장경제를 중시하는 실용주의 정당으로 바뀌고 있다고 믿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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