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트럼프 관세ㆍ보조금 압박 본격화
TSMC 중심 파운드리 생태계 확장

자타공인 반도체 강국으로 불리던 한국 위상이 점차 흔들리고 있다. 국내 반도체 기업들이 인공지능(AI)이라는 새로운 물결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사이, 후발주자라고만 생각했던 중국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까지 쫓아왔다. 정치권의 무관심과 여전히 상대적으로 미미한 지원이 이러한 위기를 가속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17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중국 창신메모리(CXMT)는 지난해 말 양산을 시작한 더블데이터레이트(DDR)5 제품에 대해 기존 17나노미터(㎚·1㎚=10억분의 1m)에서 최신 16㎚ 공정으로 전환했다. 해당 공정은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국내 기업들이 2021년 본격적으로 활용했던 10나노급 3세대(1z) 공정과 비슷한 수준이다. 기술 격차가 약 3년으로 줄어든 셈이다. CXMT는 현재 15㎚ 공정 기술을 개발하고 있으며, 내년 말 양산을 시작할 계획이다.
이미 범용 제품에서는 중국이 저가로 물량을 쏟아내면서 시장을 장악한 상황이다. CXMT는 지난해 말부터 DDR4 제품을 시장의 반값에 판매하기 시작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 등 외신에 따르면 2020년 0%대였던 CXMT의 D램 시장 점유율은 지난해 5%로 성장, 올해 말에는 12%까지 늘어날 것으로 관측했다.
국내 기업들은 고대역폭메모리(HBM) 등 고성능·고부가 제품군에서 프리미엄 전략을 펼치고는 있지만, 이마저도 최근 자국 우선주의를 내세운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등장으로 불안정해졌다는 평가다. 트럼프 행정부는 반도체 관세 및 보조금을 빌미로 미국 내 첨단 반도체 공장 투자를 늘리라고 전방위로 압박하고 있다. 관세 적용이 본격화하면 마이크론 등 미국 반도체 기업 제품이 시장의 선택을 받으면서 반사이익을 크게 얻을 것이란 지적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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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복 한국전자기술연구원 석좌연구위원은 “중국의 반도체 기술력이 급부상하고 있다는 게 올해 가장 큰 변수”라면서 “메모리, 공정, 양산 등에서 거의 다 따라잡았고 AI 프로세서 쪽은 1년 정도 앞섰다. 상당히 우려스러운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상황은 더 심각하다. 시장 1위인 대만 TSMC의 기술 초격차가 심해지는 가운데 최근에는 미국 인텔 파운드리 사업부 인수를 위해 엔비디아, AMD, 브로드컴, 퀄컴 등 주요 글로벌 팹리스 기업과 연대하려는 움직임까지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간 트럼프 행정부는 경영난을 겪고 있는 자국 기업 인텔을 회생시키기 위해 TSMC에 인수 검토를 요청해왔다. 연대가 결성돼 인수가 본격화하면 주요 글로벌 팹리스 고객들이 향후 삼성전자를 배제할 가능성이 크다는 게 시장의 관측이다.
무엇보다 반도체 생태계를 위한 정부의 물질적, 제도적 지원이 부족하다는 게 근본적인 원인으로 지목된다.
미국은 반도체법(Chips Act·칩스법)을 통해 2023년부터 5년간 총 520억 달러(약 75조 원) 규모의 반도체 지원금을 마련, 이중 130억 달러(약 18조 원)를 연구개발과 인력 양성에 투입한다. 중국은 지난해 반도체 산업 활성화를 위해 3440억 위안(약 64조 원)의 사상 최대 규모의 투자 기금을 조성하기도 했다.
반면 우리나라의 경우 기업들이 절실하게 요구하는 직접 보조금 지원 방안 등은 여전히 공회전 중이다. 주 52시간제 예외 적용 논의 역시 여야 간 정쟁의 요소로 전락하며 사실상 완전히 정지된 상황이다.
지속된 인재 및 핵심 기술 유출 역시 문제다. 실제로 경찰청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 기술 유출 사건 전체 27건 가운데 반도체 기술은 9건으로 가장 많았다. 대부분이 중국으로 넘어간 것으로 확인됐다.
반도체 업계 한 관계자는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은 변곡점에 서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면서 “정부뿐만 아니라 업계가 함께 위기를 타파할 방안을 하루빨리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