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삼성다운 저력을 잃었다”는 사내 메시지를 내놓았다. “‘사즉생’의 각오로 위기에 대처해야 한다”는 주문도 했다. 이런 메시지는 삼성 계열사 임원 2000여 명을 대상으로 지난달 말부터 실시된 ‘삼성다움 복원을 위한 가치 교육’에서 공유됐다고 한다.
이 회장은 영상 메시지에서 “삼성은 죽느냐 사느냐 하는 생존의 문제에 직면했다”고 진단했다. “중요한 것은 위기라는 상황이 아니라 위기에 대처하는 자세”라며 “당장의 이익을 희생하더라도 미래를 위해 투자해야 한다”고도 했다. 기술 중요성도 거듭 강조했다. 이런 메시지는 17일 외부에 알려졌다.
시장을 지배하는 강력한 기업이 기득권만 믿다 날개 없이 추락하는 사례는 숱하게 많다. 기업을 살리는 혁신은 현실 안주의 유혹을 떨치는 데서 비로소 시작된다. 시장의 우려를 가감 없이 받아들이는 겸허한 자세도 필수적이다. 눈도 밝아야 한다. 남의 티끌은 훤히 보면서도 제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는 태도로는 혁신 근처에도 갈 수 없다. 이 회장의 현실 진단은 그런 측면에서 고무적이다.
삼성은 ‘초격차’를 지향하는 테크놀로지 리더십을 토대로 ‘반도체 세계 1등’ 역사를 썼다. 그러나 1등 삼성이라는 이름값이 근래 흔들리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인공지능(AI) 컴퓨팅 핵심 부품인 고대역폭메모리(HBM) 납품 지연 등으로 ‘초격차’ 경쟁력도 무색해졌다. 지난해 4분기 기준 대만 TSMC의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은 67.1%로, 삼성전자 8.1%를 압도한다. 중국의 반도체 기술 역전, 글로벌 경기 침체 장기화와 트럼프 2.0 시대 등으로 삼성이 마주한 경영 환경은 그 어느 때보다 위태롭다.
기술 경쟁력을 복원해야만 AI와 파운드리에서 ‘1등 삼성’으로 치고 올라갈 수 있다. 이 회장 말마따나 “첫 번째도 기술, 두 번째도 기술, 세 번째도 기술”이다. 삼성은 19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라”고 한 ‘신경영 선언’으로 글로벌 일류 기업으로 올라선 경험이 있다. 2년 뒤 구미사업장에서 불량품을 불태운 ‘애니콜 화형식’으로 품질 경영의 새길도 열었다. 이번 메시지 또한 획기적 전환점이 돼야 한다.
충무공의 ‘난중일기’를 보면 “필사즉생, 필생즉사”란 표현이 나온다.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려고 하면 죽는다”는 뜻이다. 이 회장이 ‘사즉생’의 각오를 강조한 것도 이와 맞닿는다. 삼성 총수의 상황 인식이 참으로 엄중한 것이다. 공감이 가고도 남는다. 기술개발속도가 조금이라도 지체되면 시장에서 밀리는 건 눈 깜짝할 사이다. 삼성만이 아니라 국제 경쟁에 나선 모든 기업이 비상한 각오로 체질 개선, 경쟁력 강화에 나서야 한다.
사즉생의 각오가 필요한 것은 기업들만이 아니다. 우리 사회 일각엔 국부를 일구는 기업들을 돕기는커녕 발목을 못 잡아 안달하는 세력이 있다. 그러니 반도체 산업을 살릴 ‘주 52시간 특례’ 법안이 물거품이 되는 것이다. 정부가 땜질 처방을 내놓았지만,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이래서야 기업들이 어찌 먼 길을 가겠나. 입법권을 오남용하는 정치권 책임이 크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