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철종은 지도 한 장을 펼쳐놓고 고민에 빠져 있었다. 죽음을 앞둔 그는 얼마 전 완성된 대동여지도에 표기된 봉화와 화포의 위치를 삭제할지를 놓고 대신들과 논쟁을 벌였다.
지구 반대편 패딩턴(Paddington) 역에는 ‘튜브(Tube)’가 굉음을 내며 승강장에 들어서고 있었다. 런던 시민들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괴성을 지르며 도망치는 아이들도 있었다. 1863년 세계 최초의 지하철 ‘런던 1호선’이 개통되던 풍경이다. 이후 영국은 1차 산업혁명이 낳은 기적을 업고 빠르게 세계 패권을 장악해갔다.
그해 말, 철종이 승하하고 고종이 즉위하자 조선은 격랑에 휩쓸렸다. 흥선대원군과 민 씨 일족의 권력다툼으로 나라가 절단 나면서 500년 왕조가 문을 닫고 대한제국이 들어섰다. 산업혁명이 뭔지도 모른 채 세워진 제국은 오래지 않아 옆 나라 손에 떨어졌다.
100여 년이 흘러 1969년 7월, 인류가 달에 첫발을 내디디면서 주요국들의 ‘우주 경쟁’이 본격화됐다. 대기권 아래에서는 세계 최대 항공기인 보잉747이 첫 비행에 나섰다. 그리고 미국 UCLA와 UCSB, 유타대, 스탠퍼드 연구소 네 곳을 네트워크로 연결해 메시지를 전송하는 데 성공하면서 ‘ARPANET’이 탄생했다. 지금은 모두가 ‘인터넷’이라 부르는 통신망이다.
하늘과 우주가 열리고 정보 고속도로가 연결되는 기술혁명이 있던 그해, 한국인들은 경부고속도로 완공에 환호했다. 런던 1호선이 개통한 지 100년이 넘었지만 서울의 대중교통은 아직 노면전차가 전부였던 시기다. 고속도로 보유국이라는 뿌듯함도 잠시, 3선 개헌 파동이 일면서 다시 정치 격랑이 밀려들었다.
50여 년이 또 지난 2023년 6월, IBM이 “양자 컴퓨터가 실용화 단계에 접어들었다”라고 발표해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 미국과 일본은 ‘양자 반도체’를 공동개발하기로 했다. 그해 일본에서 열린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서 토니 블링컨 당시 미국 국무장관을 비롯한 미·일 관료와 대학 총장, 기업 등이 '협력각서' 체결식을 가졌다. 미국 마이크론테크놀러지와 일본 반도체 장비업체 도쿄일렉트론이 버지니아공대, 도호쿠대 등 양국 11개 대학과 제휴했다. IBM은 1억 달러, 구글은 5000만 달러를 시카고대와 도쿄대에 쏟아 넣는다.
이 소식을 접한 뒤 정부 최고위급 경제관료에게 “미국이 양자 반도체 개발 파트너로 일본 손을 잡았던데 우린 어떻게 되는 건가요?”라고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양자? 그게 뭐죠?”였다. “저도 몰라서 묻는 겁니다”라고 웃어넘긴 그해 4분기, 삼성전자와 TSMC 간 반도체 시장 점유율 격차는 사상 최대인 49.9%포인트(p)까지 벌어졌다. UN은 2025년을 ‘양자기술의 해’로 선포했다.
1년 뒤, 생성형 인공지능(AI) 챗(Chat)GPT-4가 세상에 나왔다. 곧바로 구글이 제미나이(Gemini)로 반격하고 중국 딥시크(DeepSeek)가 맞짱을 선언했다. 지켜보던 일론 머스크는 새해가 되자마자 X(옛 트위터)에 기반한 그록3(Grok-3)로 도전장을 냈다.
100년이 1년이 되는 기술혁명 매직에 눈이 돌아갈 지경인 시기, 우리는 또 정치 갈라파고스에 갇혔다. 미국은 ‘스타게이트 프로젝트’로 AI 국가 건설을 선포하는데 한반도에는 비상계엄이 선포됐다.
공교롭게도 한반도는 기술혁명이 세상의 천장과 바닥을 맞바꾸는 시기마다 정치가 온 나라를 집어삼켰다. 두바이에서는 에어택시(UAM)가 날고 중국 가정집에선 인간형로봇(휴머노이드)이 집안일을 돌보기 시작한다. 모든 시선이 탄핵이냐 아니냐에 쏠린 한국인은 따릉이를 타고 필리핀 이모님에게 가사를 맡긴다. 우버도, 구글맵도 못 쓰는데 쓸데없이 빠르기만 한 인터넷 속도가 그저 자랑인 우리 현실이다. 탄핵이 기각되면 돌아오겠다는 분, 인용되면 새 대통령이 되겠다는 분 모두에게 간절히 물어보고 싶다. “다 좋은데, 대체 양자는 뭡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