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순히 한 주의 근무 시간을 좀 더 늘린다고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시간으로 제약을 받는 상황 자체를 없애야 해요.”
반도체 업계 한 전문가는 최근 정부가 발표한 반도체 연구개발(R&D) 직군에 대한 특별연장근로 특례안에 관해 실효성 없는 궁여지책이라고 비판했다. 주 52시간 근무제 예외 적용 방안을 담은 반도체 특별법이 여야 간 의견 충돌로 계속 지연되자, 정부는 특별연장근로 카드를 꺼내들었다. 연장 근로를 원하는 기업은 고용노동부 장관의 인가를 받아 최대 6개월간 주 60~64시간까지 근무할 수 있다.
문제는 반도체 기술 R&D가 마치 칼로 딱 자르듯 일정 기한에 맞춰 완료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SK하이닉스는 과거 2013년 12월 세계 최초의 고대역폭메모리(HBM)를 출시하기까지 꼬박 4년이라는 시간을 밤낮없이 연구개발에 매진했다. 초기부터 개발에 참여했던 한 임원은 HBM이 노력에 비해 성과가 바로 보이지 않아 당시 직원들 사이에서 ‘오지’로 불렸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현재 SK하이닉스는 글로벌 HBM 시장을 이끄는 선두주자로 우뚝 섰다. 연구개발 당시 경직된 근무 시간에 발목잡혔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규모가 작은 중소기업이나 스타트업에게는 특별연장근로를 위한 인가를 받는 절차 자체가 부담이다. 가뜩이나 인력도 모자란 상황에서 복잡한 행정 절차에 시간을 쏟는 것 자체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토로다. 한 업계 관계자는 “신청서를 내고, 결재를 받는 과정 하나하나가 쉽지 않은 상황”이라며 “게다가 정부에 모든 게 기록으로 남게 될 텐데 혹여 나중에 잘못 찍히게 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고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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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반도체 기술 혁신을 위해 시간이라는 족쇄를 풀어야 한다. 미국, 일본, 대만, 중국 등 경쟁국들은 이미 R&D 인력에 대해 탄력적인 근무 환경에서 국가 차원의 반도체 경쟁력 강화를 꾀하고 있다. 근로 시간 문제가 정쟁의 요소로 전락해버린 우리나라와는 대조적이다. 반도체 산업은 기업간 개별전이 아닌 국가전이다. 특히 인공지능(AI) 시대 초기 주도권을 놓치면 영영 뒤처지게 된다. 정치권과 기업이 한팀이 돼 혁신과 성과 창출에 집중할 수 있도록 실질적이고 유연한 제도 마련이 시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