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트럼프 청구서’가 한반도로 날아들기 시작했다. 무역 압박, 안보 패싱, 민감국가 지정 등 그 내용도 여간 부담스럽지 않다. 한미 관계를 총점검하고 총력 대응할 절박한 시기인데도 국가 리더십은 공백 상태고, 초당적 협력은 기대할 수조차 없다. 기가 찰 노릇이다.
케빈 해셋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은 17일(현지시간) CNBC 인터뷰에서 미국에 무역적자를 안기는 대표 국가의 하나로 한국을 거명했다. 적자 원인으론 ‘비관세 장벽’을 가리키고 그 철폐를 요구했다. 4월 2일 상호관세를 부과한 뒤 한국 양보안을 보고 관세 인하·유예·철폐 등을 논의할 것이라고 선을 그은 것이다.
해셋은 “그들(대미 무역흑자국)이 당장 모든 장벽을 낮추면 협상은 끝날 것”이라며 미국 요구에 불응하는 국가엔 관세를 부과할 것이라고 했다. 해셋의 ‘그들’은 주로 유럽, 중국을 뜻한다. 하지만 한국도 함께 언급됐으니 예삿일이 아니다. 지난해 한국의 대미 무역 흑자액은 557억 달러(약 81조 원)로 미국 입장에선 8번째로 무역적자가 큰 교역대상국이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은 우리도 관세전쟁의 한복판으로 끌려 들어가는 형국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동맹국으로 전선을 확대하고 있다. 무차별 확대다. 한미 FTA에 힘입어 미국에 수출되던 자동차, 반도체 등에 종전에 없던 관세가 부과되면 우리 경제에 급제동이 걸릴 수 있다. 양국 교역 품목의 98% 이상에 무관세를 적용해온 한미 FTA의 틀을 깨고 새 틀을 짜자는 요구가 나올지도 모른다. 30개월령 이상 소고기 수입금지 규제, 엄격한 농산물 검역, 미국 빅테크에 대한 독과점 규제 등이 협상 테이블에 올라갈 수도 있다.
미국 에너지부가 연초 한국을 ‘민감국가 및 기타 지정국가 목록(SCL)’에 추가한 것도 돌발 악재다. 우리 외교부는 17일 외교정책 문제가 아닌 보안 관련 문제라고 설명했지만, 설혹 그렇다고 해도 별일 아닌 것은 아니다. 4월 15일 정식 발효가 되면 원자력 반도체 인공지능(AI)과 같은 첨단기술의 연구협력과 기술공유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
피트 헤그세스 미국 국방부 장관이 첫 인도·태평양 순방 일정에서 한국을 제외한 것도 경계를 요하는 특이사항이다. 트럼프가 북한에 대한 우호적 발언을 일삼는 판국이니 더욱 그렇다. 트럼프는 1기 시절 주한미군 철수를 들먹여 안보 참모, 측근들을 당황하게 했던 전력이 있다. 이번 일이 국민 생명과 재산을 위협하는 ‘안보 패싱’ 우려로 번지지 않으리라고 누가 장담하겠나.
지정학적·지경학적 난기류가 회오리치는 상황인데도 우리 정부는 ‘대행의 대행’ 체제로 위태롭게 굴러가고 있다. 바퀴 4개가 다 작동하는지도 알 수 없다. ‘민감국가’ 문제에 관한 정부 인지가 이례적으로 늦었던 것도 이와 무관할 리 없다. 남다른 인맥 네트워크와 통상·외교 장악력으로 총력 대응에 앞장설 수 있는 한덕수 국무총리도 하필 이 시기에 탄핵의 늪에 빠져 있다. 조짐이 좋지 않다. 어찌해야 위기 지수를 낮출 수 있을지 국가적 지혜를 모아야 한다. 초당적 대처가 요구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