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부가 늘리고 고강도 사업 재편
측면지원 아닌 강력한 후속대책 절실
중국의 저가 공세로 홍역을 치르고 있는 분야는 또 있다. 과거 ‘수출 효자’ 노릇을 톡톡히 했지만, 지금은 구조조정 골든타임에 놓인 석유화학 산업이다. 호황과 불황을 반복하는 사이클은 사라지고 성장 전략 자체가 한계에 봉착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19일 석유화학 업계에 따르면 지난해 석유화학 ‘빅 4’인 LG화학·롯데케미칼·한화솔루션·금호석유화학은 전년 대비 영업이익이 급감했다. LG화학의 실적은 반 토막 났고, 롯데케미칼은 3년 연속 적자를 지속했다. 한화솔루션도 전년 대비 적자 전환했다.
중국 정부가 내건 ‘화학 굴기’ 정책으로 시작된 대규모 증설과 글로벌 경기 침체로 공급 과잉이 심화한 영향이다. 과거 국내 기업들의 우량 고객이었던 중국의 에틸렌 생산능력은 2018년 2565만 톤(t)에서 2023년 5174만t까지 두 배 이상 확대됐다.
수요를 넘어선 공급 물량은 기업들의 수익성을 끌어내렸다. 석유화학 기업의 수익성 지표로 활용되는 에틸렌 스프레드(에틸렌에서 원료인 나프타 가격을 뺀 금액)는 2022년 이후 손익분기점인 톤 당 200~250달러를 밑돌고 있다. 범용 비중이 큰 기업들의 실적 하락 폭이 유독 큰 이유다.
국내 기업들은 저수익 범용 사업을 정리하는 한편 고부가가치 제품 비중을 늘리고 이차전지 소재·태양광 사업으로 눈을 돌리는 등 강도 높은 사업 재편에 나섰다. 하지만 고부가 제품 시장 규모는 범용에 비하면 미미한 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배터리·태양광 등의 업황도 부진한 상황이다.
개별 기업 차원의 구조조정 노력에도 위기 극복이 쉽지 않자, 석유화학 산업의 심폐소생을 위해 정부가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에 정부는 작년 말 기업활력법을 통한 규제 완화와 세제·고용 지원과 함께 3조 원 이상의 정책자금을 투입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석유화학 산업 경쟁력 제고 방안’을 발표했다.
업계는 환영의 뜻을 밝히면서도 해당 대책이 기업들의 사업 재편을 ‘측면 지원’하는 데 그친다는 점에서 과감한 후속 대책이 필요하다고 봤다.
1990년대 경기 둔화와 신흥 아시아 중심의 증설 러시로 수익성이 악화하자 범용 부문을 과감하게 통폐합한 일본의 사례를 들며 정부의 강도 높은 구조조정이 필요하단 주장도 나왔다. 대부분의 석유화학 업체가 대기업집단에 소속돼 있어 과감한 의사결정이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시 일본은 미쓰비시화학, 미쓰이화학 등 소수 기업 중심으로 생산구조를 재편하고 헬스케어, 전자소재 등 새로운 먹거리를 확보해 수익구조를 안정화했다.
정부는 대책 발표 이후 자율 컨설팅 용역을 추진하고 기업들의 애로사항을 청취해 상반기 내 후속 대책을 마련할 방침이다. 다만 정치적 불확실성은 변수다.
석유화학 업계 관계자는 “2016년에도 정부가 산업 경쟁력 강화 방안을 발표했는데 그해 말 대통령이 탄핵되면서 구조조정이 흐지부지됐다”며 “정부가 과감하게 방향성을 제시해야 구조조정의 실효성이 커진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