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창] 마포엘레지

입력 2025-03-20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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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택 연필뮤지엄 관장

아들이 초등학교 1학년 때 일이다. 학원 수업을 마친 뒤, 집까지 태워다주는 버스를 놓쳤다. 가지고 있던 500원으로 과자 한 봉지를 사 먹으며 걸어왔단다. 하필 그날따라 비까지 부슬부슬 내렸다. 녀석은 비를 맞으며 과자 봉지를 꼭 쥔 채 부지런히 걸었다. 뭔가 서러웠는지 잠시 울기도 했단다. 웃어야 할지, 안쓰러워해야 할지 몰랐다.

돌이켜보면 60여 년 전, 나 역시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아버지가 근무하던 회사로 심부름을 가려면 전차를 타고 마포종점에서 내려야 했다. 그 회사는 번개표 형광등을 만드는 ‘마포산업’인데, 전차에서 내려 조금 걸어가면 용산구 원효로와 맞닿은 언덕배기에 위치해 있었다. 5원으로 전차를 타는 대신 팥빵을 사 먹으려고 아예 처음부터 걸어간 적도 있다.

한강을 끼고 있는 마포는 예로부터 물류가 활발했던 대표적인 나루터였다. 이 때문에 조선시대부터 ‘마포 새우젓’이 유명했으며, 김장철이 되면 많은 사람이 새우젓을 사러 이 동네에 왔다. 또한, 서울 최대의 우시장이 이곳에 있었으며, 주변 지역에서는 도축장과 가죽 공장, 육류 가공업이 크게 발달했다. 덕분에 마포갈비와 설렁탕집 같은 노포들이 지금까지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흥미롭게도 경기고등학교는 경기도가 아닌 서울에 있고, 마포고등학교는 마포구가 아닌 강서구에 있다. 내가 다녔던 마포고등학교는 개교 당시 마포 전차종점 근처(현재 지하철 5호선 마포역 주변)에 있었지만, 1980년대 중반 강서구 등촌동으로 이전했다. 우리 학교에서는 은방울자매의 ‘마포종점’을 응원가로 부르곤 했다. ‘첫사랑 떠나간 종점, 마포는 서글퍼라 ~’라는 구절이 유난히 입속에 맴돈다. 그 가사에 담긴 애잔한 정서가 묘한 공감을 불러일으켰던 모양이다.

얼마 전, 설렁탕을 먹으러 ‘마포옥’에 갔다. 1949년 마포에서 개업한 이곳은 75년이 넘는 전통을 지닌 설렁탕 전문점으로, 2018년부터 2024년까지 7년 연속 미쉐린가이드 서울에 선정되었으며, 서울미래유산으로도 지정되었다. 그곳에서 뜻밖에도 ‘마포종점’에 얽힌 사연을 알게 되었다.

1960년대 마포옥은 음악인들의 아지트였다. 통행금지가 풀리는 이른 새벽이면, 밤샘 작업을 마친 이미자, 남진, 나훈아 등이 이곳에 와서 해장을 하곤 했다. 작사가 정두수도 작곡가 박춘석과 어울려 소주잔을 기울이던 중, 설렁탕집 주인에게서 실성한 채 마포종점을 떠돌던 한 여인의 사연을 들었다.

마포에 살던 한 젊은 부부가 있었다. 남편은 큰 꿈을 품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아내는 힘겹게 돈을 벌며 남편을 뒷바라지했다. 하지만 남편은 과로 끝에 뇌졸중으로 쓰러져 세상을 떠났고, 그 소식을 들은 아내는 충격에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녀는 이미 세상을 떠난 남편을 기다리듯,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마포종점 주변을 배회했다. 그러다 어느 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 안타까운 사연은 정두수의 마음을 울렸고, 그는 이를 노랫말로 풀어냈다. 그렇게 탄생한 노래가 1968년 은방울자매가 발표한 ‘마포종점’이다. 이 노래 역시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마포종점’은 멈춰 선 전차처럼, 돌아오지 않는 이를 향한 애달픈 사랑을 노래한다. 가사에는 ‘마포종점’뿐만 아니라 ‘당인리 발전소’, ‘여의도 비행장’ 등 1960년대 서울의 풍경이 담겨 있다. 이제 마포종점도, 전차도, 그 시절의 정취도 모두 사라졌다. 하지만 마포옥 설렁탕의 깊은 여운처럼, 그 기억은 여전히 우리의 마음속에 깊이 스며 있다. 우리는 그렇게 사라진 것들을 가슴에 품고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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