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ㆍ철강ㆍ부품으로 이어지는 공급망 확보
루이지애나에 차량용 강판 생산 위한 제철소 건립
로보틱스ㆍAI 분야 투자 통해 미래 먹거리 확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순신 장군의 정신과 행동입니다. 언제 어느 때보다 이런 리더십이 절실합니다.”(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2025년 1월6일 신년사 中)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트럼프 스톰’을 정면 돌파하는 승부수를 던졌다. 현대차그룹이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후 국내기업으로 처음으로 210억달러(31조 원)의 대규모 대미 투자계획을 발표한 것이다. 국내 경제인으로는 처음으로 백악관에서 두 번째 임기를 맞은 트럼프 대통령도 만났다. 올해 초 신년사를 통해 이순신 장군의 리더십을 언급하며 위기 극복을 강조한 정 회장이 최대 악재로 떠오른 관세 리스크를 제거하고 글로벌 최대 시장인 미국에서 ‘게임체인저’로 자리잡겠다는 의지를 반영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25일 현대차그룹에 따르면 따르면 정 회장은 24일(현지시간) 오후 백악관 루즈벨트룸에서 단상에 올라 “향후 4년간 210억 달러의 신규 투자를 추가로 발표하게 돼 기쁘다”면서 “우리가 미국에 진출한 이래 가장 큰 규모의 투자”라고 강조했다. 현대차그룹은 구체적으로 미국에서 △자동차 △부품·물류·철강 △미래 산업·에너지 부문에 폭넓게 투자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현대차그룹은 미국에서 철강을 생산하고 자동차를 생산하게 되며, 그 결과 관세를 지불할 필요가 없다”고 화답했다.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국내 기업 중 대규모 투자 계획을 발표한 것은 현대차그룹이 최초다. 한국 기업인 가운데 백악관에서 미국 대통령과 나란히 서서 투자 발표를 한 것도 정 회장이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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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이번 결단은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관세 부과’라는 불확실성을 일정 부분 해소할 수 있다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된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자’는 정 회장의 의지는 평소 강조한 이순신 리더십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는 분석이다.
그는 지난 1월 그룹 신년회 행사에서 미국발 관세 폭탄 등 대내외 불확실성이 커지는 상황과 관련 “피해 갈 수 없는 도전이 앞에 놓여 있지만 위축될 필요는 없다”며 “비관주의에 빠져 수세적 자세로 혁신을 도외시하지 말자”고 강조했다.

정 회장은 지난해 연말 인사에서는 호세 무뇨스 첫 외국인 최고경영자(CEO)를 배출하고 주한 미국대사를 지낸 성 김 사장을 대외협력 총괄로 영입하면서 적극적인 인사 배치를 했다. 정 회장과 함께 ‘미국통’으로 꼽히는 사장단은 미국 내 급변하는 정세에 대응하면서 트럼프측 인사들과 접점을 넓히기 위해 노력해왔다. 현대차는 트럼프 취임식 행사에 국내 기업 중 유일하게 약 14억 원에 달하는 기부금을 내기도 했다. 정 회장은 지난달 트럼프 대통령의 큰아들 도널드 트럼프 주니어를 만나 깜짝 골프 회동도 가졌다.
이같은 뚝심과 승부사 기질은 결정적인 순간마다 투자로 이어졌고 글로벌 자동차그룹 3위로 만드는 중요한 원동력이 됐다는게 대내외의 지배적인 분석이다. 그는 전동화 시대를 예견하며 그룹 최초로 전기차 전용 플랫폼 E-GMP를 개발했고, 이를 기반으로 한 현대차 아이오닉5, 기아 EV6 등은 미국 시장을 비롯한 글로벌 시장에서 판매량을 견인하고 있다.
또한 그룹의 경쟁사로 꼽히는 메리 바라 미국 제너럴모터스(GM) 회장, 도요타 아키오 도요타그룹 회장과도 연달아 회동하며 업무협약을 맺었다. 이같은 혜안 덕에 그룹은 최근 글로벌 불확실성이 커진 상황에서 GM과 북미 시장에서 전기상용차 밴과 픽업트럭 모델을 공유하는 방안에 대해 협의를 이뤄가는 중이다.
그룹 관계자는 “이번 미국 내 투자를 기반으로 미래 사업 경쟁력을 강화하고, 기업 신뢰도를 높여 지속가능한 기업으로 확고히 자리매김하겠다”고 강조했다.

현대자동차그룹이 미국에 31조 원 규모를 투자하기로 한 것은 동맹도 예외 없는 도널드 트럼프 관세 정책에 최대 시장인 미국에서 위기에 직면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진 데 따른 ‘선제 조치’로 풀이된다.
인플레이션감축법(IRA) 전면 폐기 가능성까지 불거지면서 전기차 산업 지배력 확대에 비상이 걸린 데다 중국 시장 대신 의존도가 높아진 북미 시장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만족시킬 만한 ‘통 큰 베팅’이 불가피했을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데 능통한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관세 악재를 발판으로 오히려 생산능력을 늘리고 미래산업 분야에서 사업기회를 넓히는 승부수를 던졌다는 해석이다. 이번 투자를 통해 미국에서 자동차부터 철강, 부품까지 이어지는 안정적인 공급망도 확보할 수 있을 전망이다.
정 회장은 백악관 루즈벨트룸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주재한 발표 석상에서 “이번 투자의 핵심은 미국의 철강과 자동차 부품 공급망을 강화할 60억 달러의 투자”라면서 ‘공급망 안정’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연간 270만 톤(t) 규모로 루이지애나주에 신설될 제철소를 비중 있게 소개했다. 현대제철이 건설하는 루이지애나주 전기로 제철소는 현대차그룹의 미국 내 공장에서 생산될 차량용 철강재를 제조한다. 그는 “루이지애나 제철소가 미국인 1300명을 신규 고용하게 될 것”이라며 “더 자립적이고 안정적인 미국의 자동차 공급망을 위한 근간” 역할을 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특히 HMGMA를 설립하는 대미 투자 결정이 과거 트럼프 대통령과의 만남 덕분이라고 했다. 정 회장은 조지아주 서배너에 투자하기로 한 결정은 2019년 서울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만난 자리에서 시작됐다고 소개했고, 트럼프 대통령은 웃으면서 “맞다”고 답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현대차의 대미 투자 발표로 인해 다른 자동차 제조업체들이 대미 투자를 하게 되는 청사진인가’라는 질의에 “물론이다”며 “현대는 대단한 기업이다. 우리는 다른 훌륭한 회사들도 들어오고, 여기(미국)에 머물면서 크게 확장할 회사도 있다”고 언급했다.
그룹은 루이지애나주에 전기로 일관 제철소 건설을 추진하고 현지 생산능력 확대에 맞춰 부품·물류 그룹사들의 설비를 증설한다. 로보틱스와 인공지능(AI) 등 미래 사업 분야에서 미국 기업들과의 협력도 확대한다.
미국 현지생산 확대를 위해 총 86억 달러(약 12조6400억 원)를 투자한다. 2004년 가동을 시작한 앨라배마공장(36만 대)을 시작으로 2010년 기아 조지아공장(34만 대), 올해 현대차그룹 메타플랜트 아메리카(HMGMA·30만 대)를 완공하며 미국에서 현재 100만 대 규모의 생산능력을 갖추고 있다.
이번 투자 발표에 따라 HMGMA에서 20만 대의 추가 증설이 이뤄지면 현지에서 연간 생산능력은 120만 대까지 늘어난다. 현대차·기아는 지난해 미국 시장에서 170만 대를 판매했는데 약 70%를 현지에서 생산하며 관세 부담을 줄일 수 있게 됐다.
그룹의 이번 투자는 관세 비용을 지출하는 것보다 투자 확대로 비용을 줄이겠다는 결정이다. 업계에서는 수입 자동차에 대한 25% 관세 부과 시 현대차와 기아의 이익 감소 폭을 최대 연 10조 원으로 예상한다. 단순 계산해도 트럼프 대통령의 임기인 4년간 최대 40조 원의 부담을 안게 되는 만큼 투자 확대가 더 합리적이라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부품·물류·철강 부문에서는 제철소 건설을 포함해 총 61억 달러(약 8조9600억 원)를 집행한다. HMGMA 생산능력 확대에 맞춰 설비를 증설해 부품 현지화율을 높이고 배터리팩 등 전기차 핵심부품의 현지 조달을 추진한다.
자율주행, 로봇, AI, 미래항공교통(AAM) 등 미래산업·에너지 부문에는 63억 달러(약 9조 2500억 원)를 투자해 미래 먹거리 확보에 나선다. 미국 유수의 기업들과 협력을 확대하고 현대차그룹 미국 현지 법인인 보스턴다이나믹스, 슈퍼널, 모셔널의 사업화에도 속도를 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