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세계여자핸드볼선수권대회가 한창인 12월7일 저녁. 대한핸드볼협회장을 맡고 있는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중국 창저우로 날아가 대표팀과 만찬을 함께 했다. 최 회장의 옆자리에는 주장 우선희 선수(삼척시청)가, 또 한쪽 옆자리에는 막내 이은비 선수(부산시설관리공단)가 앉았다.
아무래도 어색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 이 분위기를 반전시킨 것은 막내 이은비 선수였다. 이은비 선수는 최 회장이 맥주잔을 들이키려 하자,"그냥 드시면 안 된다"며 옆에 있던 양주를 섞었다.
이은비 선수의 돌출 행동에 주변 관계자들이 당황했지만, 최 회장은 너털웃음으로 '폭탄주'를 너끈히 비웠다.최 회장이 정해진 시간을 넘기면서까지 선수들과 대화하느라 다음 스케줄을 준비하던 비서진은 발만 동동 굴렀다는 후문이다.
최 회장이 협회장을 맡은지 1년. 핸드볼전용경기장 건립 등 가시적인 성과 이외에 핸드볼인과의 격없는 스킨십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핸드볼계가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다. 2008년 말 최 회장이 협회장직을 맡은 뒤 '한데볼'이란 말은 옛말이 됐고, 이젠 다른 비인기 종목의 시샘 섞인 부러움을 받고 있다.
정형균 대한핸드볼협회 상임 부회장은 "돌아보니 참 많은 것을 이룬 한 해였다"면서 "1년 동안 한국 핸드볼의 위상과 파워가 쑥쑥 올라가고 있다"며 2009년을 술회했다. 그리고 그 배경에 취임 1주년을 맞은 최태원 회장의 애정과 노력을 꼽았다.
정 부회장은 "협회장 취임 후 하나 둘씩 추진되어 오던 공약들이 어느새 대부분 결실을 보게 돼 핸드볼 중흥을 위한 큰 밑그림이 완성됐다"며 "2009년은 '우리나라 핸드볼 중흥의 첫 장을 연 해'로 기억될 것"이라고 밝혔다.
SK그룹 총수인 최 회장이 핸드볼협회 23대 수장을 맡은 때는 2008년 12월. 최 회장은 당시 취임사를 통해 ▲핸드볼 전용 경기장 조성 ▲핸드볼 진흥기금을 위한 꿈나무 조성 ▲적극적인 스포츠 외교를 통한 국제 위상 강화 ▲핸드볼 인프라와 문화, 경기력 향상 시스템 구축을 공언했다. 복잡하게 설명할 것도 없다.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여자핸드볼팀이 금메달을 따면서 공론회됐돈 핸드볼 전용경기장 건립이 20년 넘게 표류하다 지난해 여름 해결됐다는 것만으르도 핸드볼에 대한 최 회장의 열정이 드러난다.
최 회장은 지난 8월 서울 방이동 올림픽 펜싱경기장을 핸드볼 전용구장으로 리모델링하기 위해 유인촌 문화체육부장관, 김주훈 국민체육공단 이사장과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SK가 2011년까지 공사비 일체를 부담한다는 계획이다.
이로써 전용구장 하나 없는 열악한 국내 환경에도 불구하고 국제대회 때마다 오로지 투혼 하나로 감동의 드라마를 연출해온 핸드볼 선수들은 비로서 '제대로 된' 구장에서 연습을 할 수 있게 됐다.
핸드볼협회 관계자는 "매년 핸드볼 큰잔치 등을 열 때 마다 경기장 대관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런데 이제 전용구장이 생긴다니 꿈만 같다"고 말했다.
여자핸드볼 국가대표팀 이재영 감독은 "민관이 합심해 추진한 이번 전용경기장 조성을 계기로 보다 많은 팬들과 국민들이 핸드볼을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한국 핸드볼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유지시키려는 저변 확대 노력도 빼 놓을 수 없다. 선진국 수준의 핸드볼 성장 인프라 조성은 최 회장이 먼 미래를 내다보고 추진하는 역점 사업이다.
지난해 4월 출범한 사단법인 한국핸드볼발전재단(이사장 박기흥)은 핸드볼 발전기금 조성과 유소년 꿈나무 육성 등 다양한 과제를 실행에 옮기고 있다.
이미 25억원의 발전기금을 모았고, 지난 10월엔 전국 35개 초등학교의 핸드볼 꿈나무 138명에게 6900만원의 장학금을 전달해 화제를 뿌리기도 했다.
임오경 서울시청 감독은 "올해부터 핸드볼계가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며 "우생순 신화를 재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더 열심히 해서, 핸드볼이 국민스포츠로 자리잡는 날을 앞당기고 싶다"고 말했다.
적극적인 스포츠 외교로 경기력에 걸맞는 국제 위상을 확보하겠다는 구상도 차근차근 실현되고 있다.
올해 세계주니어여자핸드볼선수권대회를 유치,1990년 세계여자핸드볼선수권대회 이후 20년 만에 세계대회를 국내에서 여는 데 성공했다.
또 역대 대회 사상 단일 경기 최다 관중(6000여명)을 모은 '2009핸드볼큰잔치'나 4개월 가까이 진행된 '다이소배 슈퍼리그' 등을 통해 국내리그의 성장에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여자핸드볼 국가대표팀의 문필희 선수(벽산건설)는 "이제 4년(올림픽)마다 한 번씩만 관심을 받던 모습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라며 기대감을 나타냈다.
◆'오늘의 땀,내일의 밑거름'…핸드볼 정신,기업 경영에 접목
그렇다고 그가 어린시절 부터 핸드볼과 특별한 인연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중·고교시절 체육시간에 종종 진행됐던 핸드볼 수업이 학창시절 핸드볼과의 유일한 인연이다.
몇년째 축구, 야구, 농구 등 다양한 스포츠 구단을 운영하고 있지만 핸드볼과는 좀처럼 인연이 없었던 SK가 핸드볼에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2007년 초 후원을 시작하면서다. 이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세계 최고가 되기위해 노력하는 모습 속에서 SK그룹의 미래를 봤기 때문이다.
핸드볼이 비인기 종목의 설움을 달래며 흘리는 땀과 노력으로 국민들에게 희망을 전달했다면 열악한 글로벌 환경 속에서도 SK그룹이 추구하고 있는 '고객행복'의 가치를 전달하겠다는 기업정신과 맞아 떨어진다는 것이다.
지난 2008년 기업 광고를 보면 이러한 SK의 생각이 더욱 잘 드러난다. 당시 SK그룹은 통합 브랜드 광고인 '우리는 더 행복해질 것입니다-OK! Tomorrow' 캠페인에서 '핸드볼편'을 내보냈다.
2008년 북경올림픽을 전후해 방송을 탄 '핸드볼 편'은 핸드볼 경기에 대한 국민의 관심과 열망을 담아 기획됐을 뿐만 아니라, 비인기 종목의 설움을 달래며 흘리는 오늘의 땀과 노력이 행복한 내일의 밑거름이 된다는 공감적인 메시지를 전달했다.
권오용 SK 브랜드관리실장은 "선수층도 얇고 야구, 축구 등에 비해 소외종목인 핸드볼이지만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세계 최고가 되겠다는 의지를 보이면서 국민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했다"면서 "SK그룹도 기업 및 경제규모가 글로벌 메이저 기업보다는 작지만 수펙스(SUPEX·Super Excellent,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수준) 정신으로 글로벌 메이저 기업들을 이겨내 국민들에게 감동을 주겠다는 기업 경영방향과 일치한 것"이라고 말했다.
2009년 SK그룹은 그 어느때 보다 추운 한해를 보냈다. 한국 핸드볼이 '한데볼'이라는 설움을 겪으면서 자신을 단련해왔던 것처럼 SK그룹도 지난 한해 시련속에서 자신을 단련했다.
이제 최 회장의 관심 속에서 '한데볼'에서 벗어나 비상을 준비하고 있는 한국 핸드볼 처럼 SK그룹도 2010년 최 회장 체제 속에서 재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 최태원 회장의 매직넘버 '22'
태릉선수촌 핸드볼 체육관에 'T.W.CHEY'가 새겨진 붉은 유니폼을 입은 등번호 22번의 선수가 입장했다.
등번호 22번의 선수가 프리드로우 라인에서 날카롭게 골문 구석을 찌르는 슈팅을 성공시키자 핸드볼 협회 관계자 및 다른 선수들은 체육관이 울리도록 환호를 보냈다.
최태원 회장과 숫자 '22'의 인연은 또 있다. 최 회장 싸인에 숫자 '22'가 적혀있는 것. 지난 2005년 이후 최 회장은 본인의 모든 싸인에 22이라 숫자를 기입하고 있다고 한다.
알다시피 선수들에게 등번호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며, 싸인 또한 다른 이에게 본인의 성향과 정체성을 드러내는 중요한 커뮤니케이션 툴이다.
그렇다면 최태원 회장의 매직넘버 '22'는 대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숫자 22의 비밀은 그의 경영철학에서 찾을 수 있다. 22는 최 회장이 추구하는 '행복경영'을 상징한다. 행복을 한자로 쓰면 '幸福'. 바로 한자 幸福의 획수가 22인 것이다.
행복경영은 최 회장이 늘 입에 달고 다니는 말이다. 그는 소버린과의 경영권 분쟁 등 외풍을 겪은 직후인 2004년 10월 제주도에서 열린 CEO세미나에서 이른바 '뉴 SK로의 변신'을 선언했다.
최 회장은 이 자리에서 "사회가 행복해야 기업도 행복해지는 것"이라고 강조하며 SK그룹의 기본 경영이념을 '이윤 극대화'에서 '행복 극대화'로 바꿔버렸다.
최 회장의 서명에 22가 따라붙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때 부터다. 행복이란 경영철학을 상징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을 숫자에서 찾은 것이다.
22는 행복이란 뜻 이외에도 SK 계열사 간 특유의 '따로 또 같이'라는 경영방식도 함축하고 있다. 계열사별로 이사회 중심경영을 통해 '따로' 성장하고,브랜드와 기업문화를 공유해 '또 같이' 시너지를 내는 것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