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일 전격 사임한 호르스트 쾰러(67) 독일 대통령은 좌.우를 아우르는 포용력과 식견으로 국민에게서 높은 신뢰와 존경을 받았으나 독일 국민에게 인기 없는 아프간 파병 문제와 관련한 '실언'으로 2차 세계대전 이후 임기 중간에 낙마한 첫 대통령이 됐다.
지난 21일 아프간을 방문했던 쾰러 대통령은 귀국 후 도이칠란트 라디오 쿨투어와의 인터뷰에서 독일의 경제적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군사작전이 필요하다는 발언으로 '포함(砲艦) 외교' 논란을 야기했다.
국제통화기금(IMF) 총재 출신인 그는 이 인터뷰에서 독일처럼 무역 의존도가 높은 나라는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예를 들어 자유무역 루트를 지키고 무역, 고용, 수입에서 우리의 기회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도 있는 지역 불안정을 막기 위해 긴급시 군사적 개입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라고 말했었다.
이 같은 발언이 알려지자 나치의 악몽을 기억하고 있는 데다, 아프간 파병에 부정적인 독일의 여론이 악화하면서 쾰러 대통령이 곤경에 처했다.
지난해 5월 재선에 성공한 쾰러 대통령은 독일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다양한 정치적 스펙트럼을 아우르면서 '큰 정치가'로서 위상을 굳건히 했다는 평가를 받았었다.
지난 2월에는 한국을 방문해 이명박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열어 양국 간 현안을 논의하고 한국-유럽연합(EU) 자유무역협정(FTA), G20(주요 20개국) 정상회의 등에서 긴밀히 협의하기로 약속했다.
그는 2004년 임기가 1년 가량 남은 IMF 총재직을 포기하고 기독교민주당(CDU) 대통령 후보로 출마해 대통령에 당선됐다.
쾰러 대통령은 이후 '자본주의 과잉'을 질타하고 개혁을 촉구하는 등 기민당의 보수이념에 얽매이지 않는 소신 발언으로 `의전'에 치중했던 독일 대통령의 활동반경을 크게 넓혔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국민으로부터도 신망을 얻었다.
1943년 2월 폴란드 동부 스키르비스초브 마을에서 8남매 중 둘째로 태어난 그는 1945년 러시아군의 진격을 피해 피난길에 나선 가족이 독일 남동부 루트비히스부르크에 정착하면서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경제학을 전공한 쾰러 대통령은 1969년 튀빙겐 응용경제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해 1976년부터 경제.재무부에서 근무했다. 1990년 재무차관 재직 당시 마스트리히트 조약 협상에 참여하면서 헬무트 콜 전 총리가 가장 신뢰하는 금융·경제 자문관으로 부상했다.
1998년 유럽부흥개발은행장으로 부임하면서 국제 금융계에 이름을 알린 그는 2000년 5월 당시 사회민주당 소속인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의 추천으로 독일 몫이던 IMF 총재에 올랐다.
그는 부친 사망 후 공장에서 일하며 뒷바라지해준 노모를 팔순이 넘어 사망할 때까지 극진히 모신 효자로 알려져 있다.
부인 에바(63)와의 사이에 시각장애인 딸 울리케(35)와 아들 요헨(32) 등 장성한 두 자녀가 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