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외환보유액‘3000억 달러시대’개막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우리나라 외환보유고가 2000억 달러를 넘어선지 5년만에 3000억 달러 고지까지 넘보게 된 것이다.
특히 13년 전 달랑 39억 달러에 불과했던 IMF 외환위기 당시와 비교할 때 74배 성장한 규모다. 외환시장 관계자는“달러 부족으로 경제가 초토화된 쓰라린 경험을 되풀이하지 않으려고 기를 쓰고 외환보유액을 늘려온 결과”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같은 풍부한(?) 외환보유고는 또 다른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3000억 달러에 달하는 외환보유액이 적정하고 제대로 운영되고 있느냐는 것이다.
◇ 외환보유액‘많다? 적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달 말 현재 우리니라 외환보유액은 2897억8000만 달러로 중국, 일본, 러시아, 대만에 이어 세계 5번째로 많은 규모다. 이렇게 쌓아놓은 외환보유액은 세계경제를 강타한 금융위기 속에서도 든든한 방어막 역할을 해줬다.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선고와 함께 세계 금융위기가 발발했을 당시인 지난 2008년 말부터 2009년초까지 짧은기간 700억 달러에 달하는 해외 단기자금이 빠져나갈 때에도 2000억 달러 넘게 남아있는 외환보유액은 우리 금융시장을 버티게한 마지막 보류 역할을 했던 것이다. 10여년 전 외환위기 탓에 우리나라에서 외환보유고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은 이때 다시 확인됐다.
외환보유액은 정부와 중앙은행이 채권을 발행해 조달한 재원으로 축적하는 것으로 언제 어떻게 발생할지 모르는 세계 경제위기에 대응한 비상자금 성격을 띈다. 게다가 외환보유액은 안정성이 필수조건이기 때문에 정부채, 정부기관채, 회사채, 자산유동화채 등 수익률이 높지 않은 안전자산 위주로 구성된다. 주식투자분은 한국투자공사(KIC)에게 위탁한 자산 정도에 그친다.
외환보유고 운용으로 수익을 얻기보다 오히려 비용이 든다는 것. 지난 10년간 외환보유액을 운영해서 순수익을 실현한 경우는 원화를 기준으로 2003년, 2007년, 2008년 3번에 불과했다는 점은 이같은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외환보유액 3000억 달러 돌파를 앞두고 과다 논란은 피할 수 없는 수순인 것이다. 결국 지난 18일 열린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의 한은 국정감사에서도 외환보유액의 적정성 여부가 도마위에 올랐다. 나성린 한나라당 의원은“외환보유액 적정 수준에 대한 기준이 없어‘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다”며“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비용과 편익을 비교해 다시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한은은 국감 답변자료에서“과거 외환보유액이 지나치게 많다는 비판이 있었지만 외환보유액이 충분하다고 여겨지는 데도 외환 유동성 부족 사태에 처했던 신흥시장국이 많았다”며“그러한 비판은 근거가 없다는 점이 밝혀졌다”고 맞섰다.
오히려 외환보유액을 더 늘려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해외 충격으로 인한 국내 금융시장의 불안을 막기 위해선 외환보유액을 충분히 쌓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규복 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해외금융시장이 국내 금융시장에 미치는 영향이 확대된 만큼 국가 전체적으로 외환보유액 규모를 보수적으로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외환시장 불안이 우리나라 금융위기의 주된 원인인 만큼, 위기기간을 포함한 스트레스 테스트 등을 통해 국내 금융회사들의 유동성과 건전성이 유지되도록 해야 한다”며“대내외 금융시장과 외환시장이 불안정해질 가능성에 대비해 외환보유액을 충분히 쌓아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 패러다임 대전환 필요= 이처럼 외환보유액에 대한 논란이 가중되고 있지만‘정답’은 없는 상황이다. 현재 적정 외환보유고에 대한 연구는 다양한 가설에 맞춰 여러 안이 제시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외환보유액의 규모에 기준을 둔 운영방식에서 벗어나 새 패러다임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지적이다.
위안화 국제화로 자국 중심의 세계경제 질서 재편을 모색중인 중국의 경우 미국과‘환율전쟁’을 벌이고 있는 중에도 달러화 표시 자산을 줄이고 금 보유를 늘리는 등 외환보유액 다변화를 꾀하고 있다. 즉 세상이 변한 만큼 운용도 달리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해외 부동산에 투자하고 기업을 인수하는데 활용하자는 얘기도 나온다. 자산을 유동화시키면 자금 안전판 역할에는 지장이 없다는 것이다. 중국이 자원개발과 M&A에 공격적으로 나설 수 있는 배경에는 중국 정부가 보유한 외환보유액이 있다는 것은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이다.
금융권 관계자는“우리나라도‘달러화 쌓기’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현재 경제수준에 맞는 외환보유액 운용계획을 다시 수립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고 강조했다.
금 비중을 높여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글로벌 금융안정성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우리나라도 일정한 수준의 안전자산을 보유하는 데 주저해서는 안되며 현 시점에서 확보할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안전자산이 금이라는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 전체 외환보유액 중 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0.03%(8000만 달러)에 불과하다.
금융권 관계자는“앞으로는 국제 금융시장의 투자 여건 변화에 대응해 외화자산의 가치를 높여 갈 수 있는 국제 금융시장 정보 수집분석 및 자산운용 능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