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실명제의 허점 '차명계좌' 근절책 없나

입력 2010-12-02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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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명계좌 자체냐, 불법 행위냐…정책목표·규제대상 명확히해야

신한금융지주와 한화그룹, 태광그룹 등이 불법 차명계좌와 비자금 조성 등으로 문제를 일으키면서 정부가 불법 차명계좌를 근절하는 방안 마련에 나섰다.

그동안 불법 차명계좌를 근절하기 위한 법 개정은 여러 번 이뤄졌지만 여전히 금융실명제의 허점은 없어지지 않았다. 그동안 금융실명제법은 가명계좌는 근절했지만 제3자의 이름을 빌리는 차명계좌는 사실상 규제하지 못했다.

따라서 정부는 불법 차명계좌를 근절하기 위해 금융실명제와 관련된 법안을 개정 또는 개선하는 작업에 나섰다. 하지만 개선 작업은 많은 난관을 넘어야 한다. 우선 차명계좌 자체를 없앨지, 이를 활용한 자금세탁 등 불법행위를 근절할지 정책목표를 설정하는 것부터가 문제다.

◇금융실명법 허점 ‘암묵적인 차명계좌’= 현행 금융실명제법은 금융회사(은행)가 통장을 개설할 때 실명을 확인하도록 하고 이를 어긴 금융회사 직원에게 50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부과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이름을 빌려준 사람이나 이름을 빌려 몰래 사용한 계좌는 실명제법이 아니라 주민등록법 위반으로 처벌한다.

금융실명제란 계좌를 만들어 금융서비스를 받으려고 하는 사람이 본인인지 아닌지를 금융회사가 확인하도록 한 제도이기 때문이다.

이 차명계좌가 금융실명제의 최대 약점으로 지목되고 있다. 금융실명제법 아래에서는 기존에 가명으로 관리하던 계좌를 실명으로 전환하되 자금 실소유주 명의로 전환하는 것이 아니다. 제3자와 명시 또는 묵시적으로 맺은 약정에 따라 제3자 명의로 계좌를 개설해 자금을 관리할 수 있다.

결국 그동안 금융실명제법이 가명계좌를 근절했지만 차명계좌 즉 제3자의 이름을 빌려 만든 계좌에 대해서는 사실상 차명계좌를 탈세, 비자금 조성, 경영권 불법상속 등에 악용해왔다. 또 계좌 명의자가 금융회사 창구에서 개설한 통장을 실제 전주에게 전달해도 금융회사 입장에서는 이를 포착할 수단이 전무한 실정이다. 1000만원 이상의 자금이동에 대해서만 ‘혐의거래’로 보고 금융정보분석원(FIU)에 신고할 수 있을 뿐이다.

◇차명계좌 불법, 합법적 기준 명확해야= 정부는 기획재정부, 금융위원회, 국세청 등 각 부처에서 차명계좌를 근절하기 위한 대책을 수립할 예정이다. 이를 태스크포스팀(TFT)를 구성해 대책을 하나로 모아 논의할 예정이다. 국회에서도 차명계좌 자체를 불법행위로 간주해 처벌수위를 높이는 실명제법 개정안을 민주당 박선숙 의원과 한나라당 주성영 의원 등의 이름으로 제출됐다.

하지만 불법이 아닌 합의차명에 대해 규제를 가하는 것은 선의의 피해자가 발생함은 물론 금융거래 자체를 위축시킬 수 있는 등 부작용이 많다. 금융당국에서도 이같은 문제로 고민이 깊다.

금융위 고위 관계자는 “합의차명 등 선의의 피해자를 위해 금융실명제법이 아닌 특정거래금융법과 범죄수익은닉법 등 관련된 법에서 개선할 점을 찾고 있다”며 “특히 특정거래금융법은 금융실명제법과 거의 유사하기 때문에 몇 개의 조항만 개선한다면 논란이 되고 있는 차명계좌도 어느 정도 규제가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여기에서 정부의 정책목표가 확실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차명계좌 자체를 없애는 데에 초점을 맞출지 차명계좌를 활용한 불법행위에 대해 관리, 감독을 강화할지가 관건이다. 그동안 정부는 후자에 초점을 맞추고 대책방안을 모색해왔다. 따라서 차명계좌를 발견했을 대 이자소득에 대한 과징금 부과 등 처벌규정을 강화하는 방안이 유력한 것으로 전해졌다.

◇수천개 계좌에서 불법계좌 걸러낼 수 있나= 정부는 차명계좌에 대한 관리감독을 강화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범죄로 악용될 소지가 높은 차명계좌만 골라내 집중적으로 관리 감독하겠다는 의도이다.

하지만 은행계좌가 하루에도 수천 개씩 만들어졌다가 폐기되는 상황에서 문제소지가 있는 차명계좌를 걸러낼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가 불거지면서 정부의 이같은 구상도 난관에 봉착해있다.

일부에서는 이같은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 해당 금융기관에서 불법소지가 있는 차명계좌를 걸러내는 권한을 부여하자는 의견도 있지만 이역시도 정부로서는 부담이 크다. 정부의 고유권한인 조사권을 민간 금융기관에게 넘기는 것에 대한 논란의 소지가 크다는 말이다.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달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금융실명제법상 실소유자를 어떻게 파악하고 금융회사 직원들에게 이를 파악할 수 있는 조사권한을 어느 선까지 허용할지 등이 가장 고민스럽다”고 설명했다.

금융당국 관계자도 “해외는 자금세탁방지법을 중심으로 출처가 불분명한 부정한 자금거래를 방지하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국내는 금융자산의 소유자 본인이 거래하는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불법계좌에 대한 규정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불법거래 관련된 금융사 임직원 제재해야= 차명거래 자체를 금지하는 것보다는 불법 차명거래를 고의, 암묵적으로 중개하고 협조한 금융회사와 관련된 임직원을 제재조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주장이 나왔다.

윤창현 서울시립대 교수는 “가족관계와 각종 모임 등에서 비롯된 선의의 차명거래가 많고 이를 구분하기는 기술적으로 어렵다”며 “금융회사의 임직원이 협조하거나 개입하지 않는 이상 범죄목적의 불법차명거래가 어렵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금융당국도 이같은 주장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금융당국 고위 관계자도 “선의의 차명거래와 불법 차명거래를 구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며 “따라서 금융실명제법을 개정하는 것이 아닌 그와 유사한 특정거래금융법을 개정하는 방향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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