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 따라 기업과 주거래은행 관계도 역전

입력 2010-12-06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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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들 현금성 자산 증가로 ‘주객전도’

현대차그룹은 최근 주거래은행인 외환은행에 예치했던 1조5000억원의 거액을 인출했다. 또 급여계좌를 외환은행으로 사용하고 있는 직원들에게 급여계좌를 변경할 것을 당부했다.

현대차가 오랜기간 주거래은행 관계를 맺었던 금융기관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룹사 직원 상당수가 외환은행 계좌로 급여를 받을 것은 불문가지다. 이에 대해 현대차그룹 측은 직원들의 급여계좌 이체 권고나 지시는 회사의 공식 방침이 아니라고 부인하고 있다.

이같은 조치들은 외환은행이 현대건설 인수전에서 공정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경쟁자였던 현대그룹 편을 들고 있다고 판단, 일종의 보복(?)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에 대해 금융기관 출신의 한 퇴직자는 “기업들이 은행들에게 이처럼 어깃장을 부리다니...과거엔 정말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이다”고 말했다.

그러나 최근 은행들에 대한 기업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은행들이 기업들에 대해 절대적인 ‘갑’의 위치에 있었던 것에 비하면, 10여년 사이에 주객이 완전히 전도됐다.

특히 삼성전자, 현대차와 같은 대기업들의 현금보유량이 수조원에 달하면서 자금조달을 위해 은행 등 금융기관에 아쉬운 소리를 해야 했던 과거 와는 완전히 달라진 양상이다.

오히려 은행들이 큰 고객인 주요거래기업들의 자금이 이탈하지 않을 까 노심초사하는 상황이 됐다.

◇ 외환위기 이후 은행 권세 절정

은행이 기업에게 자금을 빌미로 큰 목소리를 냈던 것은 오래된 관행이었다. 국내 기업들이 자본보다는 인재와 기술력을 바탕으로 사업을 일구다보니 금융권의 자본의존도가 절대적으로 높았던 탓이다.

이처럼 은행과 기업이 소위 ‘갑-을’의 관계가 지속된 가운데 지난 1997년 외환위기 사태를 맞으면서 그 정도는 절정에 이르게 된다.

기업금융을 중심으로 한 금융권도 외환위기의 직격탄을 맞아 강도 높은 구조조정이 진행되고, 종합금융사를 중심으로 한 많은 금융사들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기도 했다.

하지만 은행들의 기업에 대한 우월적 지위는 절정에 이르게 된다. 대다수의 기업들은 보유현금이 없어 은행권의 차입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다.

실제로 실적이 좋은 데다 유동성 부족의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해 이른바 ‘흑자도산’의 사례도 비일비재해 졌다. 이런 상황에서 기업들은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은행 등 금융기관의 과도한 요구를 수용할 수 밖에 없었다.

심지어 국내 기업 가운데 가장 많은 현금을 보유하고 있다는 삼성그룹도 한 때는 은행대출 문턱을 넘지 못한 사례도 있었다.

은행들의 기업에 대한 우월적 지위는 상당 부분 유지되고 있다.

특히 이같은 현상은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두드러지고 있다. 지난해 중소기업중앙회가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중소기업 40%가 은행대출을 거절당한 적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기업들과 주거래은행의 관계가 과거와 달리 수평적이거나 기업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사진은 주거래기업인 현대차그룹이 현대건설 매각과정에서 채권단의 행동에 불만을 갖고 11조5000억원의 예금을 인출하고, 급여계좌를 변경토록 지시한 외환은행 본점.(사진= 고이란 기자)

◇ “사장님 결재보다 채권단 결재가 더 어려웠죠”

외환위기 이후 많은 기업들이 기업구조개선작업(워크아웃)에 돌입했다. 대기업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최근 몇 년간 기업 인수?합병(M&A)을 통해 새 주인을 찾은 주요 기업들이 대부분 워크아웃 시기를 거친 기업들이다.

워크아웃을 경험한 기업에 몸담고 있는 직원들의 공통된 한 마디는 “은행은 왕”이라는 것이다. 워크아웃을 경험한 A사의 부장은 “비용지출을 위해 사장님 결재를 받는 것보다 채권단 결재를 받는 것이 더 어려웠다”고 회고했다.

또 채권단이라는 이유 만으로 워크아웃 기업들의 임직원을 수시로 호출하는 등 그들의 권세는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였다. 이러다 보니,채권 금융기관의 인사적체를 해소하는 창구가 되기도 했다.

워크아웃을 경험했던 또 다른 B사 관계자는 “구조조정은 물론 임직원 급여, 회사 경영상 자금 집행 내역 등 하나에서 열까지 은행들이 관여하지 않는 부분이 없었다”며 “워크아웃을 경험한 기업의 임직원들은 은행권에 대한 막연한 적대감(?)이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 막강한 현금보유로 금융권 눈치 안본다

최근 현대차그룹의 외환은행에 대한 대응조치를 지켜보면서 격세지감(隔世之感)이라는 말이 저절로 떠오른다.

이처럼 기업이 은행에 대해 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기업들이 금융권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될 만큼 막대한 현금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은행에 대해 큰 소리를 치는 경우도 있다.

최근 국제신용평가사 무디스는 아시아지역 기업(일본·호주 제외) 가운데 삼성전자가 20조8000억원의 현금을 보유해 아시아 지역 가운데 두 번째로 현금보유량이 많다고 발표했다.

한국의 또 다른 대표기업인 현대차와 포스코, LG전자도 각각 8조2000억원, 7조2000억원, 5조6000억원 등의 현금을 보유해 모두 ‘톱 10’안에 포함됐다.

기업들의 현금보유가 이처럼 늘어난 것은 지난 2008년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글로벌 경영환경의 불확실성으로 전년도 이익을 투자대신 보유하는 쪽으로 경영방향이 선회됐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또 다른 이유로는 은행 거래선의 다변화이다. 국내 주요그룹들은 모두 주거래은행을 가지고 있다.

삼성과 한화그룹의 경우 우리은행, 현대차그룹은 외환은행, SK그룹은 하나은행 등 주거래은행을 가지고 있지만 특정 은행과만 거래하지 않고 다른 은행들과도 지속적으로 거래를 하면서 여수신 업무를 진행하면서 통로가 다변화한 것이다.

주거래은행과 금융업무에 문제가 생길 경우 다른 은행과 업무를 진행할 수 있어 과거처럼 주거래은행이 무조건 큰 목소리를 내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아울러 은행들도 가장 큰 수익원인 기업대출을 하지 못하다보니 신용도가 높은 대기업 고객 유치를 위해 기업들의 눈치를 볼수 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하다.

지난 2008년 9월 이후 은행들의 기업대출 증가율은 전월대비 1%를 넘지 못하고 있다.

재계 한 관계자는 “외환위기와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기업들이 차입을 통한 경영을 지양하는 추세”라며 “과거처럼 은행의 눈치만 살피는 상황은 점차 없어질 것으로 보이며, 오히려 산업자본이 금융자본 위에 서는 날이 올 수도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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