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양재봉 회장이 걸어온 길

입력 2010-12-09 14:57 수정 2010-12-09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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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금융계의 거목’ 양재봉 대신증권 명예회장이 85년의 세월을 뒤로 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려졌다. 9일 오후 1시20분, 혜화동 서울대병원에서 노환으로 선종했다고 대신증권은 밝혔다.

▲고 양재봉 명예회장
고 양재봉 명예회장은 1925년 전라남도 나주에서 태어났다. 목포 상업고등학교와 전남대를 졸업하고 44년 한국은행 전신인 조선은행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안정된 은행원 생활보다는 거상의 꿈을 이루기 위해 목포와 나주 일원의 쌀을 사서 부산에 파는 미곡상을 하기도 했고, 양조 사업에도 손을 댔다. 젊은 패기로 뛰어든 사업은 실패했다. 그는 다시 조흥은행 신입 은행원의 자리로 돌아왔고, 이후 여러 은행을 거치면서도 사업에 대한 꿈을 키웠다. 새로 시작한 극장 사업에서 성공하면서 그는 자신감을 되찾게 된다.

금융업 경영자로서 본격 나선 것은 한일은행 서울 청량리 지점장으로 재직하던 1970년대 초다. 당시 그는 지점장 부임 1년도 안 돼 예금 계수를 2배로 만들 만큼 실력을 인정받았다. 이후 1973년 미원그룹 임대홍회장, 해태제과 박병규사장 등과 함께 대한투자금융을 설립했다.

양 명예회장은 74년 일본 방문을 계기로 증권사업을 추진했다고 알려졌다. 도쿄에 있던 ‘노무라증권연구소’를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아 돌아오자마자 증권업 진출을 서둘렀다. 양 명예회장은 75년에 직원 11명의 ‘망해가던’ 증보증권을 전격 인수하고 대신증권으로 상호를 바꿨다.

77년 양 명예회장은 대신증권 사장으로 취임했다. 이어 업계 최초로 ‘전광시황 속보판’을 세우는 등 혁신을 거듭한 끝에 업계 2위의 자리까지 올라섰다. 그러나 사장 취임 4개월만에 회사 영업부장이 고객과 회사의 돈을 빼돌려 피해자만 100명에 이르는 대형 금융사고를 일으켰다. 당시 양 명예회장은 도의적 책임을 지고 사장 자리에서 물러난 이후 3년간 시골에서 은둔 생활을 하며 와신상담을 했다고 한다.

그가 대신증권 사장으로 돌아온 것은 81년. 대신증권의 대주주들이 양 명예회장을 찾아와 쓰러져가는 대신증권을 살려달라고 부탁했다. 당시 대신증권은 자본금을 모두 잃고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자본잠식이던 대신증권의 최대주주로 나서며 제 2의 도약의 발판을 만들었다. 80년대 초, 사회불안 경제불안으로 금리가 30% 대로 치솟을 때 회사채를 매매하면서 큰 차익을 남기며, 자본잠식 상태였던 대신증권을 건실하게 만들며 성장기반을 다졌다.

1980년대 증시 활황에 힘입어 대신증권을 증권업계 선두대열에 올려놓은 양 명예회장은 1984년 대신경제연구소, 1986년 대신개발금융, 1987년 대신전산센터, 1988년 대신투자자문, 1989년 대신생명보험, 1990년 송촌문화재단, 1991년 대신인터내셔널유럽 등을 잇따라 설립하면서 종합금융그룹을 완성했다. 그의 오랜 인생역정을 봐온 증권가는 아무리 쓰러져도 오뚝오뚝 일어나는 '不倒翁'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IMF를 대신증권이 무사히 견뎌낸 점은 양 명예회장의 공이 컸다. 1995년 아무도 위기를 느끼지 못하던 시절 그는 당시 대신증권이 보유하고 있던 상품주식을 대거 처분하여 단기차입금을 모두 상환해 무차입 경영에 들어간다. 2년후인 1997년 IMF라는 외환위기가 발생했고, 연 30%대를 넘나드는 살인적인 고금리 상황에서 많은 기업들이 부도사태를 맞게 된다. 대형증권사인 동서증권, 고려증권이 환매사태가 벌어지면서 하루아침에 부도가 나 없어졌고, 재벌이 아니면 살아남기 힘들다는 루머마저 돌아 비재벌 단독증권사인 대신증권도 어려운 상황을 맞게 된다. 그렇지만 단기차입금을 모두 상환하여 빚이 전혀 없는 상황이었던 대신증권은 IMF위기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1990년대 말 펀드열풍이 불어 대다수 증권사들이 20%대의 고금리 회사채를 편입한 채권형 수익증권을 무차별적으로 판매하고 시중의 자금은 증권사로 몰리고 있었다. 이때 양 명예회장은 회사채를 편입한 수익증권의 판매를 전면 중지시키고 안전한 국공채 위주의 채권형 펀드만을 취급하라고 지시했다. 얼마 안가 대우그룹 부도, 하이닉스 사태가 연이어 터지며 이들 기업의 회사채를 편입한 수익증권을 판 증권사에 대규모 환매사태가 벌어지면서 증권사들이 큰 타격을 입었다. 당시 안전한 국공채를 편입한 수익증권만 판매했던 대신증권은 큰 손실을 입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그는 모든 부실자산을 손실처리하며 투명경영에 나서 국내외 투자가로부터 환영을 받으며, 대신증권이 지배구조 우수기업으로 선정되도록 이끌었다.

그는 중요한 시기마다 55년 금융업계 경험을 바탕으로 한 냉철한 판단을 통해 수많은 위기상황을 돌파하는 기지를 발휘해 왔다. 1990년대 초반 증권업계를 대표하는 5대 대형사의 주인이 대신증권을 제외하고는 모두 바뀌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부침이 심한 증권업계에서 그의 탁월한 능력을 증명한다.

특히, 전산부문이 증권회사의 성장을 이끌 것으로 보고, 오래 전부터 전산부문에 대한 과감한 투자를 통해 대신증권을 온라인 증권거래 시대를 이끌어가는 대표증권사로 키워냈다. 1976년 업계 최초로 한국과학기술연구소의 전산터미날을 이용하여 전산화 작업을 시작했고, 1978년 역시 업계 최초로 자체 전산기를 도입 가동했다. 또, 1981년에는 업계최초로 현재의 전광시세판을 설치하는 등 항상 업계보다 한발 앞선 투자를 해왔다.

이 같은 초기 집중투자를 통해 타사보다 먼저 온라인거래 시스템을 구축했으며, 1999년 이후 온라인거래의 폭발적인 성장을 통해 대신증권은 또 한번의 중흥기를 맞게 된다. 이후 그는 2001년 현업에서 은퇴를 하고 지금은 고인이 된 차남 양회문 전회장에게 2001년 회장직을 물려주게 된다.

은퇴 후 그가 의욕적으로 활동했던 분야는 바로 사회공헌활동이었다. 그는 사회구성원으로서 기업의 역할에 대해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사회의 발전 없이는 기업의 발전도 없다는 철학아래 사회 각 부문의 조화롭고 균형있는 발전을 위해 기업이윤의 사회환원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이런 철학을 바탕으로 그는 1990년 자신의 아호인 ‘송촌’을 따 대신송촌문화재단을 설립한다. 대신송촌문화재단은 증권업계 최초의 순수문화재단으로, 양재봉차업자의 사재를 기반으로 설립되었다. 대신그룹의 사회책임활동의 창구로서 가정환경이 어려운 학생들에 대한 장학사업에서부터 연구여건이 열악한 학술단체에 대한 연구활동비 지원까지 다양한 활동을 펼쳐왔다.

또, 소년소녀가장지원, 사회복지시설지원사업 등 다양한 사회공헌활동을 진행하고 있으며, 어려운 가정환경으로 수술을 받지 못한 언청이 환자 360명에 대한 수술비 지원사업을 펼치는 등 사회적으로 소회된 계층에 대한 후원의 손길을 보내왔다.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2007년에는 전남대학교 총동문회로부터 국가와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한 동문에게 수여하는 ‘용봉인 영예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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