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8년 이탈리아 나폴리 근교의 작은 마을 보니토에서 태어난 창립자 살바토레 페라가모(Salvatore Ferragamo)는 일찌감치 구두 만드는 일을 천명으로 여겼다.
1909년 작은 구두점의 견습공으로 들어간 페라가모는 구두 공정을 습득한 후 13세라는 어린 나이에 고향인 보니토에서 구두점을 열었다.
최고의 구두를 만드는 일에 자신의 인생을 걸기로 한 페라가모는 1920년 할리우드로 건너가 본격적인 공부를 하게 된다.
페라가모는 맨발로 두터운 카펫 위를 걷는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구두를 만들고 싶었다.
그는 미국 UCLA 대학에서 인체해부학을 공부하는 동안 인간이 똑바로 서 있는 경우 몸 전체의 체중이 약 4㎝ 정도에 불과한 발의 중심에 쏠린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페라가모는 이에 착안해 구두바닥에 장심을 박아 발가락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처음으로 만들었다.
여기서 페라가모 구두 디자인의 기틀이 마련됐다.
아름다운 디자인에 신체를 보호하는 기능까지 덧붙여 구두를 신체미학을 알리는 매개체로 끌어 올린 것이다.
장인정신이 깃들여진 제조공정도 인기의 비결이 됐다.
구두 한켤레를 만들기 위해 134단계를 거치는 페라가모의 구두제조 공정은 대부분 수작업으로 이뤄진다.
특히 구두의 모델링과 커팅작업은 기계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실의 길이, 가죽 재단, 바느질의 정확한 위치 점검, 완성된 구두의 뒷마무리 등은 숙련공에 의해 진행된다.
끊임없는 노력으로 탄생한 페라가모 구두는 할리우드 스타들의 인기를 얻으며 열렬한 사랑을 받았다.
할리우드에서 명성을 쌓은 페라가모는 1928년 이탈리아 플로렌스로 돌아와 페라가모 브랜드의 모체가 된 기업을 설립했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좋은 품질의 구두 가죽 수급이 어려워지면서 부채에 시달렸지만 혁신적인 디자인 개발 노력으로 부활에 성공한다.
합성수지부터 코르크까지 다양한 원자재를 이용해 웨지창 신발을 제작한 것이다.
700여명의 장인들을 고용해 하루에 350켤레의 수제 신발을 제작하기 시작하며 또 다시 할리우드 스타들의 러브콜을 받았다.
페라가모는 1960년 창립자가 사망하면서 또 다시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는다.
미망인 완다(Wanda)가 경영을 물려받으면서 오히려 페라가모는 안경 향수 벨트 스카프 백 시계 및 기성복 등으로 영역을 확대했다. 명실공히 글로벌 명품브랜드로 자리매김했다.
‘구두천재’페라가모의 빈 자리를 꼼꼼한 가족경영으로 채운 것이다.
당시 38세의 젊은 미망인 완다는 브랜드 전통과 고급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 최적의 업무 분담과 자율 경영을 최우선으로 삼았다.
오너 경영의 뚜렷한 원칙을 고집하면서도 다양한 경험을 수용해 브랜드 다양화에 성공했다.
살바토레가 남긴 명품 유산은 그의 아내에서 장녀에게로 이어졌다.
열여섯 살 때부터 자녀 중 유일하게 회사에서 일하기 시작한 장녀 피아마는 1961년 런던에서 첫 번째 슈즈 컬렉션을 런칭하며 성공적으로 데뷔했다.
그녀는 특히 1978년에 리본이 달린 바라(vara) 슈즈로 인정을 받았다.
이는 현재까지 살바토레 페라가모 스타일의 상징처럼 사용되고 있다.
피아마가 1998년 9월 세상을 떠날 때까지 피아마가 닦아 놓은 브랜드의 우수성과 맞춤 제작은 여전히 살바토레 페라가모를 떠받치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있다는 평가다.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가족 기업답게 장남 페루치오는 회장직을, 차남 레오나르도는 유럽 아시아 시장을, 막내 마시모는 미국 시장을 담당하고 있다.
레오나르도 페라가모는 “가족 경영이 어려울 거라고 하지만 사실은 더 쉽다”며 “가족이라는 특수 상황 때문에 원칙이나 방향이 비슷하며 진행하고 있는 사항이나 아이디어에 대해서 항상 토론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